축음기 모양의 트로피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습니다. 올해 2월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 등 다섯 부문을 휩쓴 아델은 자신의 트로피를 쪼갰습니다. 이 트로피엔 그동안의 값진 노력에 대한 대중과 심사위원들의 호평이 가득 담겨 있었겠죠. 그만큼 트로피를 쪼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인종의 장벽에 부딪힌 비욘세를 위해 과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그녀가 올해의 앨범상을 타려면 도대체 무엇을 더 해야 하나요.
비욘세는 자신과 같은 흑인 여성들을 위한 메시지를 앨범에 담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앨범의 완성도도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날 시상식에선 만삭의 몸으로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여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비욘세는 아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많은 상을 휩쓸 것으로 기대됐는데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델과 달리 ‘베스트어번컨템포러리 앨범상’ 하나에 그쳤죠.
그래미는 이전부터 인종 차별 논란에 휩싸였는데요. 이번 시상식에선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오죽하면 아델이 동료를 위해 트로피를 쪼개고, 대신해 토로를 했을까요. 문화계엔 아델같은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은 많이 부족한 걸까요. 어느 분야보다 개방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안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소수자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꼭 비관적으로만 볼 순 없습니다. 편견에 맞서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도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온갖 차별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세상에 이를 알리는 콘텐츠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죠. 인종, 성별을 뛰어넘고자 하는 그들의 도전. 이 길에 빛이 비칠 수 있을까요.
그래미 시상식에서와 달리 올해 같은 달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그 희망의 빛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베리 젠킨스 감독의 영화 ‘문라이트’가 작품상의 영예를 안은 것인데요. 비록 ‘라라랜드’로 수상작이 잘못 불리는 실수가 있었지만 다들 수상을 축하했고, 큰 화제가 됐습니다. 흑인 감독이 만든, 흑인 배우들만 나오는, 흑인들의 얘기를 다룬 영화가 작품상을 받는 건 누구도 쉽게 상상 못했던 일이었죠.
달빛 아래에선 흑인들도 푸르게 보이지.
문라이트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흑인의 얼굴이 검다고 해서 늘 어둡게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달빛 아래에 서면 그들도 푸르게 빛이 나죠. 그러나 그들의 삶에 좀처럼 달빛은 내려앉지 않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소년 샤이론의 삶은 더 그랬죠. ‘검둥이’란 편견에 갇힌 흑인. 게다가 동성애자라는 또 하나의 짐은 그의 인생을 더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그를 빛나게 해줄 달빛은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
문라이트는 이런 소수자들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며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백인들의 잔치’로 불리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작품에도 달빛이 내렸습니다.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룬 최근 개봉작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 우주산업 발전에 기여한 흑인 여성들을 다룬 ‘히든 피겨스’, 흑백 간의 결혼이 불법이던 당시 흑백 부부를 다룬 ‘러빙’ 등이 개봉했는데요.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중 히든 피겨스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1960년대 미 항공우주국(NASA) 최초로 우주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된 흑인 여성들을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들은 흑인이란 이유로 멀리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써야 했고, 여성이기 때문에 회의 참석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당당히 이를 이겨내죠. 이 작품의 대사 한마디는 불변의 진리, 그리고 진리와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다.
이런 작품들이 올들어 유독 많이 나오고 있는데는 이유가 있겠죠. 무엇보다 ‘혐오 사회’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 이민정책 등과 맞물려 다른 인종, 다른 민족에 대한 혐오는 더욱 부각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항을 하듯 헐리우드 스타 등이 잇달아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난민 등을 둘러싼 문제가 터져 나오고 있죠. 시간이 흐를수록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전 세계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편견은 창의성의 원천인 다양성을 갉아먹습니다. 고(故)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우리도 그들(백인)도 편견의 피해자”라고 말했죠. 장벽을 쌓는 가해자 또한 피해자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이 모더니즘의 성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볼까요. 반유대주의에 맞서 유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예술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답례라도 하듯 막강한 재력으로 예술가를 지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하류 문화로 취급받던 영화에도 투자해 영화산업 발전에 기여했죠. 차별이 사라졌을 때 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다양한 나무가 있어야 숲이 울창해지듯 말이죠.
결국 문화계는 크나큰 편견의 장벽에 가로막힌 곳인 동시에 막강한 콘텐츠를 발판으로 이를 해소할 곳이기도 합니다. 과연 앞으로 어떤 길을 향해 가게 될까요. 혐오 사회에 변화의 달빛을 비출 수 있을지 눈여겨 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음 회에선 '걸크러쉬, 비반전의 반전을 이루다' 란 부제로 해당 글을 이어갑니다. 많은 기대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