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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보르미 Jun 06. 2023

아홉 개의 도시락을 싸는 엄마와 그 딸


'딩동’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조용하던 교실이 시끌시끌 거리기 시작한다.

의자를 돌려 끼리끼리 짝을 이루고, 곧 음식 냄새들이 솔솔 풍겨난다.


국민(초등) 학교 3학년부터 오후 수업이 생겼고, 우리는 점심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도시락 반찬이 담길까 잔뜩 기대하고, 엄마에게 받은 도시락을 고이 모시고 학교로 향하길 몇 달째.

사실 처음에는 점심시간이 눈이 빠지도록 기다려졌고, 쉬는 시간마다 내 도시락은 잘 있나 만져보고 이리저리 살펴보곤 했었다.

점심을 먹게 되는 날이 점점 쌓여갈수록 점심시간은 처음의 기쁨과는 다르게 나는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요플레라는 걸 후식이라며 가져오는 아이, 색깔도 고운 분홍 소시지와 노란 계란프라이 반찬을 날마다 싸 오는 아이, 귀하디 귀한 바나나를 가져오는 아이....

내 반찬은 늘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대부분의 날이 김치였고, 좀 더 좋은 날은 볶음 김치, 정말 좋은 날은 어묵볶음의 수준.

그런 반찬을 싸 온다고 나에게 아무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가 주눅이 들어서는 점심시간이 영 반갑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돌아왔고, 나는 주눅이 든 채 도시락 가방을 열었다.

그날따라 엄마는 수저를 빠트리셨고, 당황해하고 있는 나에게 담임선생님께선 본인 수저 중 포크를 내게 건네주셨다.

그냥 포크를 받아서 맛있게 도시락을 먹었으면 되었을 그날.

나는 포크를 받아 들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고, 선생님이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날 밥을 먹었는지 먹지 못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서 답답해하시던 선생님 얼굴만 기억에 남아있다.


나는 칠 남매 여섯째 딸.

형제가 하나둘인 친구들에게 그런 가족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항상 부끄러운 일이어서 딱히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나 선생님에게,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아이처럼 보였으면 했다.

그런 내 모습에 흠집을 낸 게 그놈의 도시락.

점심시간만 아니면 난 발표도 잘하고, 공부도 곧잘 하는 모범적인 아이로 친해지고 싶은 친구일 거라 믿고 있었는데, 점심시간의 도시락 반찬으로 인해 내 모습에 흠집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진짜 내 실체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웠었다.

그런데 수저를 빠트렸던 그날.

나는 꽁꽁 감춰두었던 내 모습을 들켜버린 것 같아 어디라도 숨고 싶었다.

엄마의 자상한 챙김을 받지 못하는 그런 아이란 걸 친구들이 다 알게 된 것만 같았다.  

난 발가벗고 운동장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었다.


국민(초등) 학교 3학년.

이제 겨우 10살의 나는 왜,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엄마는 아침마다 총 9개의 도시락을 싸셨다.

출근하시는 아빠부터 회사 다니는 언니, 저녁까지 공부해야 해서 2개를 싸야 하는 언니들 것까지.

그런 엄마는 아침이면 늘 분주했고, 엄마를 대신해 압력밥솥의 딸랑딸랑 취~ 울리는 추소리가 나를 깨우곤 했다.

10인용 압력밥솥에서 갓 지어낸 많은 밥은 도시락용으로 거의 다 사용되었고, 공장 기계 돌 듯 반찬통을 일렬로 줄지어 놓고 반찬을 쭉쭉 담아냈다.

그런 엄마에게 만만한 반찬은 김치였고 다른 반찬은 품도 삯도 많이 드는 일.

엄마는 엄마 나름의 최선을 다해 도시락을 싸고 계셨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식들에게 아무리 똑같이 사랑을 나누어 준다 한들 내게 주워지는 사랑은 남동생까지 포함해 7명 중에 하나로 7분의 1.

유난히 남동생을 더 많이 예뻐한 걸 감안하면 8분의 1, 9분의 1 정도였던 것 같다.


늘 사랑에 목말라 있던 내가 맞이했던 아홉 번째 생일.

사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았을 아홉 살 꼬마는 꼬깃꼬깃 모아 두었던 지폐 세장을 들고 시장에 갔다.

내가 고른 건 스텐으로 된 설거지통.

나 낳느라 고생했다고 생일은 낳아준 엄마에게 감사하는 날이라는 편지와 함께 엄마에게 설거지통을 선물해 드릴 생각에 기쁨에 가득 찬 발걸음의 그날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렇게 엄마 눈에 예쁜 딸, 착한 딸, 말 잘 듣는 딸이길 바란 이유는 뭐였을까....


겨울의 한 중턱에 있는 정월대보름.

그날 엄마는 나를 낳고, 또 딸이라는 이유로 본인은 아랫목에 누워있고 나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문지방에 밀어 두셨단다.

그럼에도 내가 눈을 깜박이며 울지도 않고 잘도 누워있어 엄마가 슬쩍 끌어당겨 옆에 두었다는 이야길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에게… 듣던 날,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살려주셔서 키워주셔서 감사한 마음과 어찌 그런 이야길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야속한 마음.


알고 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이미 지난 일 곱씹고 곱씹을 필요도 없다는 걸.

그리고 그 엄마 또한 어쩔 수 없었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아픔마저 내 것이었으며,

그 아픔으로 지금의 내가 있고,

그 아픔으로 더 나은 나를 만들고 있음을...

이제는 안다.


10살의 나에게....

포크를 들고 눈물을 흘리던 나에게...

포근히 안고 위로해 본다.

사랑한다고 충분히 사랑받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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