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아홉 식구.
하루 세끼 9×3 = 27 끼니
한 달이면 27×30 = 710 끼니
한 끼에 쌀이 100g 사용된다면 100×710 = 71000g
한 달에 71kg의 쌀이 필요한 상황.
기억에 엄마는 항상 쌀을 한 가마니로 사셨던 것 같다.
나는 4인가구로 애들 학원비에 생활비에 뭐 이것저것 하다 보면 맞벌이를 해도 빠듯한데 아홉 식구가 외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기술자로 수입이 나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아홉 식구였기에 우린 늘 부족했다.
특별한 기술이 없고, 배움도 없었던 엄마는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들을 많이 하셨다.
제일 장기간 하셨던 건 일명 양말 뒤집기였다.
납작한 플라스틱으로 회전이 되던 그 장치에 양말을 씌우면 쫙 펴진 양말이 눈앞에 보인다.
불량이 있나 없나 앞뒤 회전해 가며 눈으로 확인한 후 양말을 벗긴다. 벗김과 동시에 다시 다음 양말이 씌워진다.
나는 엄마의 조수로 엄마 맞은편에 앉는다.
아직 앉은키가 작아서 낮은 의자 위에 엉덩이를 올려 엄마랑 높이를 맞추고, 리듬에 맞춰 양말을 씌우다.
엄마는 내가 씌운 양말을 쓰윽 확인한 후 획 벗긴다.
동시에 나는 다시 재빠르게 다음 양말을 씌운다.
한 짝이 완성되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방과 후엔 많은 시간을 엄마 앞에 앉아 양말 뒤집기를 도왔고, 양말에서 나오는 먼지들로 늘 코를 킁킁거렸다. 참 재미없고 지루하고 벗어나고 싶었지만, 내가 도우면 속도가 붙어 훨씬 많은 양의 양말을 완성할 수 있었고, 엄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엄마는 늘 트로트를 틀고 일을 했고, 나는 친구들이 부르는 가요보다 트로트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됐다.
90년대엔 국민(초등)학교 앞에서 돗자리를 펴고 병아리를 파는 사람, 장난감을 파는 사람 등 학교 앞 보따리상이 활발했다. 특히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교회에서 전도 나오는 사람들까지 합쳐져서 늘 복작복작거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 앞은 돗자리를 펼쳐놓은 장사꾼과 구경하기 위해, 물건을 사기 위해 모여든 어린이들로 복작복작거렸다.
오늘은 어떤 물건들이 왔으려나 친구들과 여럿 무리를 지어 정문 앞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낯이 익은 얼굴…
엄마였다.
엄마는 여학생들의 머릿 방울을 돗자리에 한가득 펼쳐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그 앞에서 구경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순간 나는 의식의 흐름이었는지 무의식의 흐름이었는지 알 수 없게 고개를 숙였다. 엄마가 내 얼굴을 봤는지 못 봤는지 알 수 없었고, 그냥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과 비굴한 내 모습에 눈물이 났다.
엄마는 마흔에 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을 낳았다.
그 시절 엄마들에 비하면 엄마 나이는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남동생은 할머니 같은 엄마를 아주 창피하게 여겼고, 학교 가는 길 엄마가 동행하는 것도 아주 싫어했다. 그 사실을 알고 엄마는 운동회나 학교에 갈 일이 있을 땐 동생과 나란히 걷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동생이 참 싫었고, 그런 엄마가 참 측은했다.
하지만 나도 솔직히 정말 솔직히... 그런 엄마가 창피했다.
그런 내 마음을 엄마에게 들킬까 일부러 더 엄마 옆에 바짝 붙어 팔짱을 끼고 걸었다.
나는 국민(초등)학교 때 줄곧 반장을 맡았다.
6학년 때는 전교 부회장까지 지냈다.
공부도 잘하는 편에 속했고, 방학이면 오히려 학교에 가는 날을 손꼽을 정도로 학교생활을 좋아했고, 그런 나를 선생님들은 많이 예뻐해 주셨다. 내가 유일하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곳이라 여겼다.
그런 내게 학교 앞 돗자리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저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이야기하는 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오후 엄마는 장사를 끝내고 장사가 잘 됐다며 흡족하게 돌아오셨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고, 학교에서 봤던 엄마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못했다. 엄마도 거기에 대해선 어떤 말씀도 없으셨다.
엄마는 그 뒤로 더 이상 우리 학교 앞에선 장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가 되었고 그 시절의 나만큼 아이들이 자랐다.
학교에 가는 날이면 다른 이들의 시선보다 나는 내 아이들의 시선이 더욱더 신경 쓰인다.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문득 그날의 엄마도 그려본다.
왜 하필 우리 학교였을까....
주위엔 많은 학교가 있었는데....
삶이 버거웠을 여자는 아이들의 입장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고, 물건이 잘 팔려 돈을 벌 수 있었음이 기뻤으리라. 그 돈으로 그 어떤 사치도 없이 아끼고 아껴 아홉 식구를 살려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