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어도 기억에 남을 순 있습니다.
한 전시회를 다녀왔다. 전시회장을 들어서기 전, 가장 잘 보이는 문 앞에는 이번 전시회의 주제가 아주 커다랗게 적혀있었다.
‘no-name, 이름 없는.’
무슨 이름이 없다는 걸까? 의아한 마음을 품고 전시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하얀색 벽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양쪽 벽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십여 점의 그림, 사진 등이 전시되어있었다. 왠지 모종의 위생관념을 일깨워주는 것 같기도 해 어느 때보다 조심히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조용하고 천천히 전시작들을 관람하던 중, 한 관람객이 행사 관계자를 찾아가는 장면을 발견하고 슬쩍 가까이 가보았다.
“죄송한데, 여기 작품들에 이름이 없는 것 같아서요. 실수하신 건가요?”
그는 정중히 물었고, 관계자 측에선 낮게 웃으며(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책자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아, 이건 실수가 아니고, 이번 저희 전시 주제가 이름 없는 작품들을 전시하는 거라서 그렇습니다. 여기 책자가 있으니 함께 보시며 관람하셔도 좋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멋쩍은 듯 웃으며 인사했고, 관계자 역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라며 친절히 인사했다.
다른 관람객들도 듣고 있었는지, 전시회장이 유난히 조용해서 그런 건지 하나둘 책자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나 역시 팸플릿 하나를 가져와 펼쳐보며 아까 전시회장에 들어올 때 보았던 주제를 다시 상기했다.
‘no-name, 이름 없는.’
다시 살펴보자 이곳은 주제에 걸맞게 꾸며져 있었다. 여느 전시회를 가도 보이던 작가 이름, 작품 제목, 그리고 작품 설명이 여기엔 없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 어디에도 네임태그가 없었다. 궁금증을 못 이긴 나는 기자라고 밝힌 후, 전시회장 밖으로 나와 주최자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이름 없는 전시회를 열게 되었나?” 물었다.
주최자는 웃으며 답했다.
“모든 작품에는 처음부터 제목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작가 이름, 작품 제목이 있다고 해서 작품 자체가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작가이지만 받아들이는 건 이 작품을 보는 사람, 즉 우리들의 몫이죠.(웃음) 제목이 없어서 더 꼼꼼히, 찬찬히 살펴볼 수도 있고, 제목이 없어서 더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럼 사진과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관람에 불편을 느끼진 않을까요?”
그녀는 답했다.
“이번 전시는 배경지식 없이 절대 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로 와도 자신만의 방식대로 관람하고 받아들이면 된다는 취지입니다. 작가의 성향, 작가가 자주 보이는 패턴을 몰라도 볼 수 있는 작품들로 모아놓았습니다. 작품에 나름대로 제목을 지어 봐도 좋습니다. 작가님들께 허락을 받았으니까요. (웃음) 꽤 저명한 작가의 작품도 곳곳에 숨어 있으니 이를 맞추는 재미도 있을 겁니다.(다시 웃음)”
그리고 그녀는 끝까지 홍보에 충실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1층에서 전시를 충분히 관람하시고 2층에 올라오시면 예쁜 기념품들이 있으니, 구경하고 가셔도 좋습니다.(웃음) 작품을 잘 보신 분만 맞힐 수 있도록 숨은그림찾기 등의 간단한 게임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준비 많이 했으니 많이들 오셔서 보고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갑작스런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전시회는 이름 없는 작품들로 채워졌지만, 그곳에 다녀온 후로 내 가슴에는 이름을 뺀 모든 것이 남았다.
오늘은 하필 1년에 며칠 없는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 이 허무한 기분을 ‘no-name, 이름 없는.’에 들러 채워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주변에 추천해볼 요량이다.
기사 입력 2016년 05월 20일 22시 00분
윤 기자 amoremioy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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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처럼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윤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