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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게티를 포크보다 젓가락으로 먹어야 편안해 지는 기분

비가 오는 날, 우산보다 레인부츠같은 위로를 주는 수다여행

by 이원희

[수다가 고프다.]


그녀와의 수다는 늘 즐겁다.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도

어제 만난 것처럼 우리의 수다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1박 2일의 수다는 1년을 살아갈 에너지를 축적한다.


하마터면 방전될뻔했다. 우리.


토요일 오후 3시부터 시작된 대화는 새벽 4시가 되어서 겨우 멈췄고, 오전 10시에 눈뜨자마자 시작된 대화는 헤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번씩,

나는. 그녀는

우리의 수다가 고프다.


굶주린 배를 채우듯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며 우리는 울고 웃는다.





[와이낫!]


'누가 우릴 40대로 보겠어?'

'야, 무슨 소리야. 무조건 아줌마지'


'그때 대만에서 플렉스 동영상 기억나?'

'나 그거 100번도 넘게 봤어. 볼 때마다 배꼽 빠질 것 같아'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지인들 이야기,

가족의 변화,

나의 그녀의 변화,

주변인들의 안부와 건강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까지 끊이지 않고 풍성했다.


누가 그랬더라,

돈 안 들이고 스트레스를 푸는 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와 함께

욕을 하는 것이라고!


삶의 무게를 이제야 알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가,

나중에는 뽀글 머리로, 그리고 백발로 바뀌어도

이렇게 신나게 수다를 떨 수 있을까?



그럼!

오브콜스.

와이낫!!!




[30년 지기]


나와 그녀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이다.

중학교가 같은 학교였다는 이유로 우리는 금세 친해졌고.

왜 7명이 뭉쳐서 놀았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그녀를 포함한 7명이 우르르 몰려다녔고

그냥 선생님들이 우리를 7공주파라고 불렀다.


우리는 매일같이

"고등학교 친구가 평생 간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며 우리의 우정을 확인했고,

당연히 우리는 평생 함께 활기차고 시끄럽게 살아갈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고, 각자의 삶이 버거웠고, 가열차게 살아가면서 서로를 만나지 않아도 될 이유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7공주는 흩어졌다.


지금은 그 멤버 중 만나는 친구는 그녀가 유일하다.

늘 SNS를 통해 소식을 보고, 듣고 있기에 매일 만나지 않아도

매일 만나는 가족과도 같다.


그녀의 집으로 내가 한 번씩 갈 때면

친청언니네 집에 놀러 가는 기분이 드는 것을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깝다.


서로 참 잘 맞는다.

아니 서로를 터치하지 않고, 인정한다고 해야 할까?





[첫날, 맛나는 시간]


구미도착, 3시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그녀를 맞이하러 기차역으로 갔다.

몇 개월 만에 만나는 듯하다.


미리 예약해 둔 금오산자락 계곡으로 가서 백숙을 먹었다. 너무 더운데 맛있다. 백숙이 맛있는 건지 함께하는 소주가 맛있는 건지 우리의 수다가 맛있는 건지,


그냥 함께하는 순간이 맛나다.


나의 유튜브 촬영 썰을 풀었다. 그리고 우리는 한바탕 울었다.

그녀가 왜 우는 건지, 내가 왜 울컥했는지는 서로가 잘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애틋한 마음을 우리는 느낀다.


이미 한바탕, 두 바탕, 목놓아

울다가 또 울었다는 그녀는

또 말하면서 울먹거렸다.


내가 노가다를 하는 것이 슬픈 게 아니라.

날개를 달아주면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날개가 되어주지 못해서. 뭔가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날개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쓰인다고 했다.

내가 자랑스럽다가도 마음이 아픈 손가락 같은,

혼자서도 잘살고 있어서 부럽고 멋지다 하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아린단다.

그 마음 우리 엄마 같아서 알 것 같다.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늘 뜨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멈추지 않은 괘종시계 같다고 해야 할까.

멈출 것 같이 느슨해지면 스스로 태엽을 감아 다시 생생하게 울린다.

1시간마다 시계가 여기 있노라, 까먹지 말아 달라, 열심히 시계는 움직이고 있다고 알아달라고 '뎅~'하고 소리를 내는 것처럼 나 역시도 멈추지 않고 매번 '뎅~'하고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그녀는 차분하지 않지만 차분하고, 조용하지 않지만 조용하다. 그래서 그러는 걸까.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삶을 대하는 태도, 바라보는 시선들이 모두 다른 그녀와는 참 사소한 대화도 깊어진다.


그렇게 우리는 계곡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소 체크인을 해야 했다. 체크인을 하고 맥주 한잔을 서비스로 받아 들고 산책하며 주변 전집을 찾았다.




"그 인스타사진 어떻게 된 거야"

"아, 그때 말을 못 했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그녀의 언니는 이혼을 했고, 서로 각자 안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나는 이혼할 때 흔들리지 않았던 생각이, 절대 아이들에게는 나쁜 아빠를 만들지 말자라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했고, 의도치 않게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었다. 상처에 대한 극복은 아이들과 나도 각자의 방법으로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나를 낳아준 사랑하는 아빠를 미워하거나 증오하는 마음이 생기면 아이들의 삶을 갉아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혼 후 아이들 앞에서 아빠와 언성을 높이는 다투는 좋지 않은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혼 전 많이 싸웠으니..) 이혼을 통해 내가 스스로 성숙해지고, 안정을 찾으며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미안해하는 아빠가 되길 바랐고, 그가 끝까지 아이들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나의 생각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차갑지만 차분하게 했고, 이혼 전보다 후에 더 아이들을 위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 방황했던 아이들도 점차 받아들이고 이해했고,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100프로 다 알 수 없는 마음이지만 나중에 아이들이 "왜~ 그랬어!?"라고 따져 묻거나 원망하게 된다면 나는 진심을 담아, 온마음 담아 사과하고 싶다. 나의 미안하다는 사과만으로 아이들의 상처가 아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언니는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혼 후 X형부는 모든 인연을 다 끊고 10여 년이 지나도록 외국에 있으며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다. 많이 미웠으리라. 이혼하고 나서 아빠가 아이들을 찾아도 지랄, 안 찾아도 지랄이라고 했다. 그 마음 알고 있기에 늘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을 흘러 그도 아이들도 우리들도 성장했다. 현재 상황들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미웠던 마음은 내려놓은듯하다. X처제 집에 다 같이 모여 면접교섭을 했다. 둘째가 원했기 때문에 모든 어른들이 동의했다. 난 잘했다며 맞장구쳤다. 아이들을 위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똑같다. 그들은 모여서 어릴 적 옛이야기를 나누고, 언제든 아이들을 위한 소통을 하기로 했으며, 호칭은 형부에서 오빠로 바뀌었다. 이제는 서로의 안녕을 바라는 사이가 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의 모습으로 가족의 모습을 정리한 거다. 그녀는 함께 웃는 모습을 SNS에 공유했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서로의 상처에 집중하기보다는 앞으로 빛날 미래를 기원하고, 서로의 행복을 염원하는 거짓 없는 마음이었으리라고.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원했고, 한가족이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나는 100번 이해하고도 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행복한 각자의 삶을 응원한다.


아이들은 웃었고, 어른들을 울었고. 다 함께 웃었다고 했다.

나는 내 생각, 슬픔과 많이 오버랩되면서 눈물이 났다. 기쁘고 슬프고 애잔하고 복합적인 느낌의 눈물이였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주어진 상황, 환경들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더 좋은 마음을 줄 수 있는 방향이 있을까 생각했다. 언니는 다른 시각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이야기를 직간접적으로 듣고, 보았다. 꼭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조금씩 변했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우리의 경험은 비슷하게 같지만 다르고, 다른 것을 통해 서로 깨닫기도 하고, 알아가며 배우고 응용하여 각자의 삶에 녹였다. 우리는 서로 깊은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삶의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함께 그것을 나누며 서로에게 자극을 주기도 하고, 더 성장하게 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을 보며 또 한바탕 울었다. 슬픔의 눈물이기보다는 행복의 눈물이었으라. 그동안 고생했어. 토닥토닥의 의미였으리라. 복잡하지만 단순한, 조금은 더 성숙해지고 싶은 어른의 삶으로 한 발자국 내디딘 눈물이었다. 입모양은 이를 들어내며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빨갛게 눈물이 고여서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여유로웠고, 안정적이었고,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우리를 방해할 수 있는 소음은 없었다.


행복했다. 이런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숙소로 돌아간 우리는 그동안의 지내온 썰을 속사포로 풀어놓는다. 낮시간동안 얘기한건 지내온 썰이 아니었던가! 풀어내고 풀어내고 또 풀어는데도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1년 전 사업을 시작했다. 물론 그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너무 불행하다고 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한 감정들, 그 감정들 사이에서 오는 피로감에 지치고 있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늘 친구가 많고, 새로운 인연들을 잘 만들어가는 친구였기에 의외였다. 늘 인간관계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시간을 쪼개 쪼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이 유일한 낙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동네 언니들과 만나도 재미없다고 했다. 머릿속으로는 일 생각을 하고, 시간이 아깝다고 느끼고 있는 본인이 너무 불쌍하다고 했다. 물론 지갑은 두둑해졌지만 그것으로 인한 본인의 스트레스가 과연 수입만큼 합당한가를 고민하게 된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버겁다며 통제할 수 없는 영역 즉, 타인의 감정에 대해 어디까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인지 "그래,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고 지인들을 관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느낀다고 했다.


나는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상대를 이해할 수 있겠냐며 그냥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 나의 삶의 질을 향상한다는 것을 느낀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너무 고립되어 있는 내 직업에 고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흔들지 않는 기준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것 역시도 뭐가 맞는 건지,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자,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격지심이 튀어나와 질투를 하게 되더라 이야기했다. 나는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쉬고 있으며 차 한잔 하는 브런치카페의 엄마들을 보면 나의 고단함이 밉고 싫다. 그것이 능력 있는 남편이 없는 싱글맘의 자격지심으로 한 번씩 올라온다고 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도 불쑥불쑥 그렇게 올라오는 감정들을 주체 할 수 없다고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행동에 대한 맞고 틀림을 판단하거나,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유를 물으며 따져 묻지 않는다.

그저 우리의 목소리는 노래처럼 흘러나오고

귀로 통해 들어오고 마음으로 흘러나간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감동을 하고, 감사를 하고, 감격하고, 대견해한다.

마음으로 흘러나온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에 여운이라는 잔상을 남기며

서로를 응원하고, 호응하고, 동의하고 공감한다.


끊기지 않는 수다는 옹알이처럼

새벽 4시가 다되도록 이어지다가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둘째날,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그래도 구미까지 왔는데,,

금오산 케이블카는 타봐야지 않겠어?

10시쯤에 눈이 팅팅부운 내가 이야기했다.

나는 그러다가도 잠이 들어버렸고 그녀는 체크아웃준비를 했다.


이전에는 입은 움직이면서 맛집을 찾아다니고 핫플을 찾아다녔는데 말이야.

이제는 그런 것도 귀찮지만, 금오산 호텔에서 묵고 있는데 케이블카라도 타야지!


결국 근사한 브런치는 생략하고 초콜릿 하나만 달랑 입에 넣고, 이 더운 날씨에 산림욕을 시작했다.

숨이 차고 왜 케이블카 탑승구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이냐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우리는 결국 탑승했고, 시원한 산바람을 즐겼다.


"나중에 우린 등산은 못할껴."

"못해. 못해"

"그래 그냥 헝가리 가자."

"무조건, 무조건이야."

"그래. 약속했다."


고맙다.

너의 충언. 명심하겠어.

또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내 식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겠지만


우리의 대화는

당 떨어진 나에게 초콜릿 같고,

방전된 나에게 배터리 같다.

비가 오는 날 필요한 우산인 것이 아니라 레인부츠 같으며,

스파게티 먹을 때 포크가 아니라 젓가락으로 먹어야 편안해지는

그런 기분이야!


다른 이들의 대화보다,

나의 대화에서 풀리는 그 무언가가 있어서 너무 좋다는,

힘들 때면 나와 꼭 만나야 직성이 풀린다는,

다른 사람과 함께 가면 우리의 행복한 추억이 희석될까 싶어, 대만은 안 가고 싶다는 그녀는

나의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이자, 여행메이트이다.


우리의 수다를 통해

무거운 삶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낸다.

아니 그 무게는 여전할지더라도 나의 어깨가 튼튼해지는 영양제를 먹는다고 해야 할까?


일 끝나고 팅팅 부어오른 나의 다리에 마사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물로 족욕을 하며 노곤하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직접적인 말로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서로의 눈빛으로 우리들의 고단함을 덜어낸다.


그녀와 나는 매일 전화하지 않고, 매일 안부를 묻 않아도

아주 가끔 만나 이렇게 밤새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한 연대감을 느낀다.


지금의 긴 생머리가 짧아지고, 뽀글 머리가 되며 백발이 되더라도

나의 괘종시계는 태엽이 감겨 움직일 것이고, "뎅~'하고 나 여기었노라~ 소리를 내면

그녀도 조용하지 않지만 조용하게 나와 함께 그렇게 또 함께 울고 웃을 것이다.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우리의 수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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