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머문 마음
딸은 물을 잔뜩 머금은 니트 마냥 온종일 축 늘어져 있다. 침대 위에 누워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린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른 종류의 진통제를 먹여본다. 약이 어서 온몸으로 번져 그녀의 고통을 앗아가 주기를 바란다. 얼굴은 만개한 여드름 꽃으로 가득하다. 어제보다 훨씬 더 붉고 번진 느낌이다. 그 꽃길 위로 고통이 흐른다. 고통을 환기라도 시켜볼 겸 조용히 방문을 열어본다. 예상대로 그녀는 고통의 무게에 눌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언제쯤이면 나아질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기는 할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까지 더해져 방의 공기는 더 무거워진다. 환기되지 않은 공기를 뒤로 하고 그 방을 나오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뒤쫓아온 무력감이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털리지 않는 니트 옷의 보풀 같다.
딸은 생리통이 심하다. 시작하는 첫날에는 학교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지독히 앓는다. 어느 날에는 선생님의 부축을 받고 1층까지 내려왔다고도 하고, 시험 기간과 생리가 겹친 날에는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하여 대략 어떠할 것이라고 짐작만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을 지켜주고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것뿐이다.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그녀만의 몫이다.
딸의 생리통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다. 산부인과에 가 보는 것은 기본이었고 다양한 진통제를 찾아서 복용시키기 시작했다. 이름만 들으면 잘 아는 약에서부터 외국의 약까지 두루 섭렵했다. 다양한 진통제를 먹여보고 그 효능을 관찰했다. 무엇보다 딸에게 어떤 약이 가장 잘 맞는지 살펴보라고 했다. 어떤 약은 먹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무용지물이었다. 또 어떤 약은 속이 안 좋아 더 고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별로 효과가 없다로 점철되었다.
약이 잘 듣지 않자 극심한 생리통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사례를 귀동냥하기 시작했다. 병은 소문을 내야 한다더니 다양한 사례들이 쏟아졌다. 그중 가장 실천해 볼 만한 것들을 추렸다. 배를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핫팩을 구비했다. 보온 물주머니도 같이 마련했다. 그리고 징후가 다 나타난 이후보다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일 때 약을 복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했다. 날짜를 보고 몸 상태를 살핀 뒤 조짐이 보이면 약을 먹으라고 했다. 철분이 부족하면 생리통이 심해질 수 있다고 하여 철분제도 사 주었다.
우리는 이 모든 정보를 그녀에게 전하기만 했다. 진통제를 언제 먹을지, 핫팩을 배에 붙일지 말지 등은 온전히 그녀 자신이 선택해야 할 문제다. 그 누구도 그녀의 몸이 될 수 없으니 스스로 자신의 몸이 하는 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부모가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설령 해줄 수 있다 해도 그것이 그녀의 성장을 방해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견디고 배우며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몸의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딸처럼 나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간구하곤 한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헤아려줄 수는 있지만 그 무게가 얼마만큼인지, 얼마나 상처가 났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하나, 나 자신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독이는 일은 병원에 가기 전에 나 스스로 내 상처가 얼마만큼인지 인지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 정도면 잘 극복할 수 있을지, 치료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 없어 두려움으로 어깨가 자꾸만 움츠려 든다.
상처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듯 내 등을 토닥여 줄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상처에 새살이 돋게 하는 지름길이 된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남편에게 마음의 소리를 전한다. 어떤 해결책을 내어놓지 않더라도 그저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맞장구쳐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처에 연고를 바른 것 같다.
수많은 작가들의 진심이 담긴 책은 또 어떤가! 때로 글은 용기를 주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며 공감을 치료제로 내놓기도 한다. 글 넝쿨의 수많은 가지 중에 작고 작은 가지가 내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기도 하고 주춤거리고 움츠러들었던 나의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 밑줄을 긋고 띠지를 붙이며 그 글을 곱씹다 보면 어느새 상처는 사라지고, 책 속을 거니는 시간 동안 잊고 싶었던 현실도 어느새 잊혀진다.
수북이 쌓인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글을 쓰고 있다. 글은 언제 왔는지 이미 내게로 와 있다. 내게 온 글이 나를 떠나기 전에 어서 붙잡아야 한다. 오랫동안 가슴에 고여 있던 말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며 내 손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준비를 한다. 가끔 글은 나보다 앞서 나가 저만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글을 쫓아가느라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글을 다 쓰고 나면 마음에 고였던 것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며 위로가 되어 주기도 하고 나를 응원해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아파하는지 나를 더욱 또렷하게 부각시켜준다.
딸은 아직도 자신에게 딱 맞는 생리통 처방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도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고통도 다 흘러간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난다고 고통에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일정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녀보다 더 빨리 내 마음의 처방전을 찾은 셈이다. 앞으로 또 다른 마음 처방전이 쓰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내 편인 사람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라는 처방전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어 다행이다. 기쁜 날도, 슬픈 날도 내 모든 삶에 책과 글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하다. 상처 난 삶에 새 살이 돋게 하고, 주저하는 내게 앞으로 나아가라 등을 떠밀며, 그만하면 충분히 잘했다 소리 없이 칭찬해 주는 그들이 있다.
책상 위에 고요히 놓인 책을 편다. 현실의 나를 여기에 두고 나는 그곳으로 떠난다. 시작될 여행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상처가 아물고 더 성숙해질 것이란 사실은 명확하다.
깊은 밤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내 방을 채운다. 마음에 새 살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