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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Feb 08. 2023

사람이 하는 일

그림책 <사라진 저녁>과 함께

나는 타고나길 겁쟁이였다. 어머니가 들려준 일화에 의하면, 간신히 두 발로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조짐이 보였다고한다. 가령 계단을 내려올 때 똑바로 서서 걸어내려오지 못하고, 네 발(?)로 내려왔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머리를 아래로 향하고, 불안하고 위태롭게 갓 걸음마를 뗀 어린 시절의 내가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하니 내 입장에선 공포 영화를 연상시키듯 다소 기괴하기까지하다. 


아무튼, 이런 겁쟁이 장녀를 둔 부모님의 걱정도 이만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겁이 많기는 정말 많았으니까. 그들의 상상 속의 나는 사회 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부적응자가 되어, 온갖 손가락질을 받는 어른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때마다 부모님은 자신들만의 검증되지 않은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키며 나를 단련하고자 했다. 특히 어머니는 ‘동물의 왕국’ 같은데서나 보았을 법한 동물의 세계에 빗대어 자신의 교육법을 설명하곤 했는데, 일명 ‘새끼 사자 절벽에서 밀어뜨리기’가 그것이었다. 야생에서의 사자들이 정말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내용은 이렇다.


‘어미 사자가 여러 마리의 새끼 사자들을 강인하게 만들기 위해 절벽에서 떨어뜨린다. (왜지?) 새끼 사자들은 절벽을 안간힘을 써 기어 오른다. (떨어져 죽지 않았을까) 절벽에서 기어 올라온 새끼들은 살아남아 밀림의 왕이되고,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한 새끼는 가차없이 버려진다.’


어머니가 매를 동반한 따끔한 가르침을 선사하며, 사실 검증이 필요한 동물의 세계와 질서를 빗대어 이야기를 하는 편이었다면, 아버지는 달랐다. 자식 교육에 크게 관여하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개입했다. 아버지의 당시 표현대로하면 ‘쪼다’ 같은 행동을 할 때 그랬고, 그 개입은 내성적인 겁쟁이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큰 시련처럼 느껴졌었다. 


주말이었고, 어머니가 외출해 없는 때였다. 아버지는 짜장면을 먹자는 귀가 솔깃해지는 제안을 했다. 그리곤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네가 천안문에 전화해서 짜장면 세 그릇을 시켜라.”


친구들 앞에서도 쭈뼛대기 일쑤였던 내게 ‘전화 주문’은 넘기 어려운 산과 같았다. 나까짓게 ‘삼천원을 줄테니, 짜장면을 만들어서 우리집 앞까지 가져다주시오’ 하는 노련한 거래를 할 수 없다 생각했었고, 특히 말이 빠르고 다소의 화가 느껴지는 중국집에 전화를 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결국 나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몸을 베베꼬고 있었고, 배가 고픈 아버지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 세 그릇을 주문했다. 하지만 더 큰 시련은 30초 뒤의 다음 대사에 있었다.


“이제 네가 중국집에 전화해서, 짜장면 취소해!”


뒤의 일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도 끅끅대며 울었을 것이고, 그런 ‘쪼다’ 같은 모습에 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을테다.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한 새끼 사자는 짜장면을 먹을 수 있었을까? 


겁쟁이 어린이는 겁쟁이 어른이 되었다. 그 사이에 겁쟁이도 잘 적응해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이나 서비스가 많아졌다. 이제는 대놓고 ‘쪼다’ 소리를 듣진 않게 되었다. 참 다행이다. 그 공을 세운 데엔 ‘배달앱’의 역할이 컸다. 나는 배달앱이 없었더라면, 세상의 참맛(?)을 영영 누리지 못한 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짜장면 세그릇을 먹기 위해, 중국집 사장님과 나눌 대화의 대본을 쓰지 않아도 되고,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두루루, 두루루’ 울리는 신호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탕볶밥’ 메뉴를 ‘탕짜면’으로 상대가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정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었다. 배달 기사님과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서서, 현금을 건네고 거스름돈을 주고 받는 일이나, 카드를 읽히고 명세서가 나오는 일을 기다리는 대치 따위도 없어도 되었다. 비대면 배달이 일상이 되면서는 더 좋았다. 문앞에 두고 간 것을 한 뼘 틈으로  손을 뻗어 수거만 해오면 됐으니까. 소심이, 겁쟁이에겐 참으로 다행인 세상이 온 것 같았다. 겁쟁이인 걸 들키지 않고도 배달 음식을 실컷 주문해 먹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휴대전화 화면을 두드리고, 문앞에 놓인 것을 부스럭거리며 주워오면 되는 음식들. 만든 사람도, 그것을 가져다준 사람도 지워진 음식을 편하게 먹으며, 포동포동 쉽게 살이 올랐다.


문명의 수혜자인 겁쟁이 주제에, ‘사람이 지워진’ 서비스나 물품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내 일터에서의 경험 덕분이었다. 몇 년 간 서점에서 일했고, 편의점에서도 때때로 일한 적 있었다. 책이나 물건들엔 바코드가 붙어 있고, 날이 갈수록 계산 시스템은 좋아져 손님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거래를 할 수 있게 된 세상이 되었다. 타고난 겁쟁이인 나는, 어찌어찌 사회적인 역할도 잘 수행하고는 있었지만, 손님과 큰 교류 없이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건 정말 마음이 편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때때로 손님과 나 사이의 거리가 2m도 채 되지 않는데, 이런 류의 대화가 들려오는 때가 있다.


“여기 책(물건) 별로다. 전시 기획된 것도 너무 허술해. 괜히 왔어.”

“직원분이 듣잖아.”

“안들려. 그리고 뭐 어때. 들으라지.”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는 다른 일에 집중한 척 태연히 연기를 한다. 저런 류의 대화는 심심치 않게 들었다. 자신들 앞에서 계산을 해주는 사람을 귀가 있고, 생각이 있고, 꿈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가족이 있고, 퇴근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퇴근 후 돌아갈 집이 있는 그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나눌 수 있는 그런 대화들. 고개를 숙이고 다른 일을 하는 척 연기하는 내 정수리에 꽂힌 가시 박힌 대화들은 한동안 마음에 남았다. 


나는 꼭 몸으로 직접 겪어봐야, 일을 좀 당해봐야 희미하고 미약하게나마 깨달음을 얻는 편이다. 그제야 좋게만 보였던 배달앱과 음식 주문이 새로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주문하기도 한참 전, 이른 오전에 치킨집 문을 여는 이름 모를 사장님의 뒷모습, 생닭 조각들과 사투를 하는 사람들, 배달앱의 주문을 확인하고 조각난 치킨들을 기름에 넣는 행동들과, 헬멧을 쓴 배달원이 그것을 들고 기꺼이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빌라 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그런 모습들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현관 앞에서 몰아쉬는 배달 기사님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도 몇 건의 배달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겠지, 오늘의 고단함을 벗어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겠지 하고.


이런 감사한 마음을 품고도, 내성적이고도 겁쟁이에다 소심한 나는 별달리 표현하지 못한 많은 날들을 보내고 또 보냈다. 눈을 맞추고 ‘감사합니다’ 한마디 하는 것이 뭐 어렵나 싶지만, 배달앱의 지독한 수혜자인 나는 그러지 못했다. 소심하게 별점 5점을 매긴 리뷰를 남길 뿐. 적어도 어딘가에서 ‘사람이 하는 일’을 놓고 무례할 일은 줄었겠다 생각할 뿐이다. 





권정민 작가의 그림책 <사라진 저녁>을 읽고 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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