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보, 어쩌면 좋아."
힘들어 죽겠다는 정해진 대사처럼 윽윽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한 아내의 한마디.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건 덤이다. 요즘 힘들다고 너무 엄살을 떨었나 싶다.
몇 달 사이 숨만 쉬어도 피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간이나 신장이나 뭔가 탈이 난 게 아닐까 싶었다. 극심한 피로감에 가뜩이나 힘겨운 보행은 아예 고행에 가까워 휠체어에서 엉덩이를 떼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근육량은 튀어나오는 배만큼 정확히 반비례하게 줄어들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다 직립 보행은커녕 직립조차 못하겠다 싶어 미루던 검사를 했다.
안 좋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안 좋으면 병가를 내고 회복 겸 재활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분명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죽을 것 같지는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심 적당히 안 좋아도 좋겠다 싶었다.
"왜? 어디 많이 안 좋데? 병가는 두 달은 쓸 수 있다는데.."
"병 가는 무슨.. 너무 좋다는데? 간도 콜레스테롤도 아주 정상이래."
"에? 근데 왜 이렇게 죽을 지경이래?"
"그게 저번에 말한 대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래. 이야기해 놓겠다고."
놀랐다. 걱정스럽던 간이나 기타의 장기들은 너무 상태가 좋다니 무슨 배신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근 재활을 염두에 둔 상담에서 선생님은 요즘 느끼는 극심한 피로가 스트레스의 영향일 수 있다고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니 결과를 보시고는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다고 한다.
결국 그런가. 내가 스트레스에 지쳤다는 사실이 또 다른 스트레스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지만 요 몇 달은 계속 휘둘렸다. 일머리도 모자라는 데다 타인과의 관계도 모자란 사람과 일하다 보니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야 하니 휘둘리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본인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힘겨워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사람을 보는 거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스트레스가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입만 벌리면 그 사람을 험담하고 깎아내리 게 되고 또 그런 내가 쪼잔하고 추하게 느껴져서 또 스트레스였다.
이런 감정 쓰레기를 집에 와서 아내에게 쏟아 내지도 않으면 벌써 회사를 떠났을지 모른다.
#2
딱히 위로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실은 그런 마음이 가끔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하소연처럼 쏟아 내면서 마음을 풀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는 지금의 기분은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회사에서 안 먹어도 배부를 만큼 욕을 먹는 건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마음고생을 하고 있다. 열 받고 속상하고 분단위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다 보니 어디라도 쏟아 내야지 안 그러면 병난다. 그래서 퇴근 후 아내에게 "때려치우네 마네" 하며 폭풍 수다를 떨면서 그렇게 매일 위로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착각이었다.
"그만 두든, 다른 일을 하든 생각만 하지 말고 밀어붙여야지 추진력이 그렇게 없냐"라며 태풍급 핀잔을 들었다. 또 하소연을 이과수 폭포급으로 쏟아내는 나에게 아내는 말 그대로 지겨우니 이제 그만 징징대라는 것처럼 말을 자른다.
순간 사방이 꽉 조여들어 오는 듯하더니 가슴 깊이에서 욱하며 화가 치밀었다.
사실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진득하게 한 직장에서 버티지 못했다. 결국 나 하고 싶은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겠다고 회사를 아예 때려치우고 집 팔아 사업하다 망했다. 다들 말리는 걸 귀 똥으로도 안 들었다. 그렇게 백수로 지내다 피붙이 하나 없는 머나먼 제주도로 가겠다고 나섰다. 또 다들 말리는 제주도 이민을 감행하고 나서도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상경했다. 다시 올라와서 디자인 강사 일을 하면서 둥글지 못한 성질머리 탓에 이런저런 일로 학원을 옮겨 다녔다.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니 아내가 "사는 게 불안하다"라는 마음을 털어놨다. 너무 미안했다. 그놈의 성질머리나 하고 싶은 걸 참지 못하고 내 좋을 대로 하고 살았더니 아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걸 잘 몰랐다. 진짜 그랬다.
그래서 사회복지를 시작하면서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고 열 받다가 이제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를 때는 "조금만 참아"라는 아내의 말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질질 끌면서도 출근을 하고 웃고 떠들고 감정이 바스락거릴 때까지 버텼다.
그랬는데 정말 힘겹게 버티는데 이제와 "너 꼴리는 대로 못하고 왜 징징대"라니. 속상하달까. 섭섭하달까. 착잡하달까. 점점 들숨만 있고 날숨이 없다. 이렇게 숨이 꽉 막혀보기도 처음이다. 무지 답답하다.
이젠 집에서조차 덜어내긴 글렀다. 에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