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라는 함정
본 글은 강원랜드 복지재단 복지아카이브에 복지큐레이터로 기고한 내용입니다.
https://klf.or.kr/sub/04/board-view.php?board=board04&type=view&uid=25724&gopage=1&nickname1=d
강원도로 아내와 단 둘이 떠나는 여행. 느려도 좋으니 오랜만에 경춘가도를 달리기로 했다. 양평을 지나 춘천 쪽으로 접어들자 곳곳에 멋들어지게 들어선 음식점과 카페들이 눈길을 끈다. 그러다 스치듯 그러나 눈에 확 박히는 문구.
장애인을 배려해주세요!
운전하며 지나치느라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입구 앞 주차장 현수막에 카페 주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겼다. 이곳은 커피도 진하고 향기로울 게 확실하다. 한데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불편이 계속되리라 생각하니 씁쓸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좋은 의미로 사용하는 '배려'에는 힘의 권력이 녹아 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행위에 배려라는 마음을 가지면 이미 자신은 그보다 힘의 논리에서 상위에 포진한다. 그것은 "나는 당신과는 다르게 '멀쩡'하거나,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으니 내가 해주겠다"라는 시혜적인 마음이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 잡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는데서 오는 뿌듯함이나 뭔가 좋은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굳이 안 해도 될 일을(돕는 것) 하지 않는다고 해서 느끼는게 되는 죄책감은 크지 않아서 '선택적 시혜'를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나는 사회복지나 장애인복지와 관련해 전국에서 사회복지사들이 모이는 워크숍에 종종 참석한다. 그때마다 십중팔구는 편의시설 문제로 곤란을 겪는다. 심각한 건 숙박을 포함한 교육에서 숙소와 교육장에 턱과 계단이 있어 들어가지도 못할 상황이 자주 있다는 거다. 그때마다 용기 있게 외치는 누군가 있다.
우리가 휠체어를 들면 되죠, 우린 같은 사회복지사 아닙니까!
속에서 천불이 난다. 드는 사람이야 영웅 심리가 발동되든 말든 물건을 들어 올리듯 힘 한번 쓰자고 하면 되겠지만 들려 올라가는 사람의 입장은 그게 아니다. 이때도 우리의 영웅들은 약자를 배려한다. 근데 사실 애초에 약자를 만들지 않으면 될 문제다. 턱은 없애고 계단은 엘리베이터나 경사로로 대체하면 된다.
또 하나는 장애인에게서 사람이 아닌 장애만 보려 하는 인식의 문제다. 장애가 되는 문제만 제거하려다 보니 대부분 휠체어에 앉은 채로 높이 들려 올려질 '사람'에 대한 감정을 미처 살피지 못한다. 휠체어에 앉은 채로 들어 올려진다는 건 조선 시대 양반이 가마 타는 기분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렇게 '들어 올려지는 일'은 사람들에게 '다르다는 것은 불편하다'라고 일반화시키고 또 당사자의 존재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일이 되는 점에서도 감수성을 인지해야 하는 일이다. 말 그대로 원치 않는 쪽팔림을 강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주최측은 이런 곳이었음을 미리 인지하고 대책을 강구하거나 워크숍 장소를 바꿨어야 했다. 장애 혹은 장애인 때문에 불편해지는 게 아니라 호텔의 시설이 갖춰 있지 않아서이고, 이를 사전에 알아보지 않은 담당자의 인식 때문이다.
아울러 덧붙이면, 사회복지사임에 약자의 불편함 해소에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게 아니라 누군가 불편함을 겪는다면 당연하게 '그냥' 돕는 거다. 배려가 아니다. 여기서 배려란 처음부터 휠체어 이용자가 있으니 위크숍 장소를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있어 접근이 용이한 곳을 사전에 알아보는 일이다. 미리 불편한 '장애물'을 없애주는 것, 그것이 배려다.
인권은 인간으로 당연히 가지는 기본적인 권리리며, 헌법이 가지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넘어선다. 따라서 개인이 일상에서 '누리는' 모든 영영에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는 사회권이다. 예를 들면, 대중교통은 국민으로서 교통비를 지불하면 당연히 누리는 권리다. 누구에게만 한정된 특권이 아니다. 한데 휠체어, 유모차, 이동보조기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교통 약자가 되어야 하고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제한받는다.
출퇴근 시간에 이런 사람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노동자며 세금을 납부하는 납세자다. 대중교통 이용을 누리는 일반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다. 2000년 대 초 저상버스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출퇴근 시간에 휠체어로 출근은 꿈꿀 수 없다. 물론 대안으로 장애인 콜택시(이하 장콜)를 운행한다고는 하나 기본으로 1~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장콜은 출퇴근 시간에 이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하철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인권적 평등은 시혜나 배려가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 존재될 수 있으며,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개인과 집단 사의에서 차별 없이 동등한 상태를 의미한다.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는 인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배려는 평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그게 아니면 동정이나 시혜일 뿐이다.
[Sarwer e Kainat Welfare 님의 사진, 출처: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