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된 지 올해 34년 되었다. 스물한 살에 그리 됐으니 세월 참 빠르다. 그러고 보면 예능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참 버라이어티 하게 살았다. 갑자기 불편해진 몸으로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포트란과 베이직 같은 프로그래밍을 배워 자격증을 땄다. 나는 아메바 버금가는 단세포 뇌를 가졌다. 매사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건 번지점프만큼 어려운 일이다. 프로그래머는 다음 생에 하기로.
CAD를 배웠다. 건축설계 아르바이트도 하며 재미 붙였지만 취업은 다른 이야기였다. 한데 그 덕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입사해 미국, 일본, 스페인 등 여러 나라 하청 작업부터 국내 창작물까지 작업했다. TV와 극장에 내 이름이 올랐다. 기가 살아 스튜디오를 창업했다. 황홀했지만 곧 망했다. 그 덕에 서울, 성남, 안양, 군포, 안성, 제주까지 돌아다니며 디자인 강의를 했다. 나름 인기 강사여서 10시간 넘는 강의를 해야 했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장애인 복지관에 입사하고 사회복지사가 됐다. 하다 보니 석사도 됐다.
그렇게 장애인 복지를 10년 넘게 하면서 '장애인식'이 나와 너, 우리가 전부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매일매일 깨닫는다. 이젠 별로 새롭지도 않다. 그중에 장애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자주 말한다. 장애는 그냥 살아지는 것이지 넘어야 할 목표도 미션도 아니라서 극복할 필요가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자꾸 사람들은 그 어려운 걸 해내다니, 대단해요! 라고 칭송을 한다. 도대체 내 말은 왜 귓등으로도 안 듣는지 모르겠다.
어려운 걸 해내는 일은 <태양의 후예> 유시진 말고도 누구에게나 대단한 일이다. 해내려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그건 꼭 장애가 있어 대단한 건 아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조금 더 그래 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전부인 것처럼 포장할 필요 없다. 굳이 정색하고 이런 글로 마무리하는 이유는 이 책으로 내가 장애를 극복했다거나 그래서 여러 분에게 용기를 주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그저 난 좀 수다스러운데 그러자면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내가 사람 만나는 걸 기피해서 글로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 안에서 내가 느닷없고 허망하기까지 한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고 그 후로도 꽤 오랜 시간 숨만 쉬었다는 걸. 나중에는 결국 몸 쓰는 게 아주 많이 불편하게 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얼마나 버라이어티 했겠나? 게다가 병원엔 김사부나 익준이 같은 의사만 있는 게 아니다.
할로베스트는 초 단위로 우울지수를 높였다. 중환자실 천장만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조금 버틸만해졌다. 단지 재수가 없었다거나 운명이 그따위여서, 심지어 엄마 자신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네가 이렇게 됐냐며 입원 내내 딸기코로 지냈다. 한데 전생까지 끌어 들일 필요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된 거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신에게 엄청난 비난과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심한 욕을 날렸으니 여한도 없었다. 그도 배불리 욕먹느라 많이 당황했을 거다. 알잖은가, 재수를 탓하고 운명을 탓해 봤자 머리털만 빠진다.
나는 그냥 나고, 장애를 극복하지도 않았다. 그냥 살다 보니 장애가 생겼고 생긴 김에 가는 날까지 안고 가는 것뿐이다. 뭐 특별할 것도 특별해질 것도 하나 없는 그냥 그렇게 된 일이다. 이상하게도 또 특별하게도 하물며 신기하게도 볼 필요도 없다. 그리 뚫어져라 빤히 보면 내가 한잘생김 한 것으로 착각한다.
살면서 그냥 그렇게 된 일은 꽤 많다. 갑작스러운 이성 친구의 이별 통보라든가. 이건 내가 꽤 여러 번 당해서 잘 안다. 허구한 날 차이는 기분이란. 아무튼 울며불며 라디오에 사연 보냈는데 떡하니 상품이 도착한다거나. 또 여행지에서 갑자기 만나 폭우에 속옷이며 몸 라인이 다 드러나 어깨가 심하게 공손해지거나 하는 일들. 생각하면 차고 넘친다. 그냥 그렇게 된 일은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면 된다.
서두가 길어졌다. 다시 고백하건대 작정하고 용기나 위로를 주려고 써낸 글이 아니다. 가만히 앉아 숨만 쉬어도 힘든 세상에서 솔직히 누가 누굴 위로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내 글이 가슴에 와닿아 운 좋게 위로가 되면 좋은 일이고, 더 답답해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냥 그런 거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입소문 나서 이왕이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기관장을 하고 있을 나이에 딸보다 어린애랑 같은 현장 실무자로 일하는 건 창피하긴 하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여전히 꿀 수 있는 꿈이 있는 것도 다행이다. 이것도 살다 보면 그냥 그렇게 될지 모르겠다. 혹시 누군가 지금 죽을 만큼 힘들다면, 그냥 다 지나간다는 말은 하품 나겠지만 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믿어도 된다. 불안하고 두렵고 힘겨운 무언가 맞닥뜨린다면 숨 한번 깊게 쉬고 그냥 그렇게 다 지나갈 거라 외우는 주문은 효과가 있다. 혼자 숨을 쉬지 못해 에크모를 달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랬다. 당신도 못할 게 뭐 있나.
마지막으로 내 인생 시작과 마무리에 두 여인이 있다. 이 책을 그들에게 바친다. 내가 다친 것도 자신의 죄라며 여전히 전전긍긍하시는 어머니 이화자 여사와 첫 만남에 몸이 불편한 게 뭐 어떠냐며 마음을 세차게 흔들더니 지금도 나를 빛나게 만들지 못해 안달 난, 아내 이음미 씨에게 온 마음 바쳐 감사하다. 뭐 마음은 그렇다. 더 바라진 말고.
글 주제: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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