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중반,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
얼마 전에 읽었던 교정교열가 김정선의 <열 문장 쓰는 법>에서 글쓰기 책으로 추천할만하다,라고 해서 궁금했다. 글쓰기 관련 책을 여러 권 봐왔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라고 할만한 걸 잡은 건 김정선의 책이 처음이었는데, 그런 그가 손에 꼽는다니 몹시 궁금했다.
'읽는 책이 아니라 쓰는 책',이라고 큼지막한 소개로 시작하는 저자 이상원은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15년째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고, 인생 중반의 글쓰기는 인생 단계의 '옮겨감'을 도와줄 것이라면서 자신한다. <엄마와 함께한 세 번의 여행>, <매우 사적인 글쓰기 수업>,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등 90여 권의 책을 쓰고 옮겼다.
프롤로그에 "어떤 방법으로 쓰든 서서히 나를 알게 되고, 그런 나를 이해고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좀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라는데 나는 늘 '나'를 궁금했기에 괜히 고맙기도 하고 기대도 됐다.
읽다 보니, 저자의 말이 맞았다. 읽는 책이 아니라 쓰는 책이다. 시종일관 쓰게 만든다. 밑줄까지 그어 놓고 '자, 여기에 쓰면 돼요.'라고 하는 것처럼 질문하고 '내' 생각을 기다리는 것 같달까.
한데 쓰라면 쓰면 될 것을 구시렁대는 이유야 뻔하다. 어떻게 쓰지? 봐줄 것도 아닌데? 막 써? 뭐 이런 혼란스러움이 있다. 내가 쓰고 내가 고쳐? 저자의 피드백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에 대한 의심이 든다. 쓰지도 않고 고칠 것을 걱정하는 나도 우습긴 하지만 그냥 쓴다는 건 언제나 쉽지 않다.
글쓰기에, 아니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단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꽤 많은 분량 앞에서 망설이지 않을까? 서둘러 덮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 자체가 망설여졌다.
누가 보면 어쩌지,라는 부끄러운 걱정이 들 것을 어쩌면 저자도 짐작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위한 글쓰기 가이드'로 적당한 타이밍에 등장해 조언을 해준다. 포기하지 못하게 말이다.
"글을 통해 나에게 말을 거는 작업은 지금까지 몰랐던 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해줄 가능성이 높다."
47쪽_내 일상을 보살피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흑인 최초의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을 세운 테니스 선수 아서 애시가 했다는 "왜 하필 내가?"라는 말을 읽다가 목구멍을 막고 있던 것이 순간 컥 하고 튀어나온 듯했다.
그건 내가 목이 부러져 더 이상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을 때, 나 역시 매일 매 순간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때 그 감각들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저자의 말처럼 누리게 되지 못하게 된 것들이 너무도 억울해서, 그런 것들에는 접착력 높은 질문으로 찰싹 붙인 채 세상 불행해 했었으니까. 애시의 담대함에 순간 지질해졌다.
이어 3장 <내 실패를 위로하다>에서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선택이 있는가?'라고.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결과가 빚어졌으며, 그 선택을 안 했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 물었다.
먹먹해졌다. 어쩌면 매 순간 나는 이 질문을 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삶이 이리도 모질게 바뀌었는데, 나는 그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당최 그려지지 않는다.
36년 전 그러니까 21살이던 그때,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을 가자고 성화를 부리던 친구들을 뿌리치지 못해서 목이 부러졌다. 그때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쭉 건강하게 살았을까? 그래서 남들처럼 열심히 살았을까?
애니메이터, 디자인 강사, 사회복지사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정신없이 일에 빠져 대부분 고통스러웠지만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던 일들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몸이 불편한 나를 누구보다 예뻐해 주는 아내를 만났을 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고, 몸이 불편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을 이루며 살았을까? 체대를 졸업하고 선생님? 교수? 관장? 막노동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무얼 했을 거라 그려지지 않는 걸 보면 후회하는 것보다 이만한 게 어디냐,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겠다 싶지만 가슴 한쪽이 참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글쓰기가 막막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런 경험들을 어떻게 '글감'으로 풀어내는가라는 벽을 마주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문법을 모른다는 것보다 활자로 바꿔야 하는 말이나 감각들에 대한 난감함이 글쓰기를 멀찌감치 밀어두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뭘?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데 읽고 쓰다 보면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용기가 불쑥 생긴다.
사실 저자는 인생 중반의 글쓰기를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꼭 중년이 아니더라도 자신을 잘 알고 싶거나 그런 나를 글로 드러내 보고 싶다면 연령대와 상관없이 읽어보면 좋겠다 싶다.
저자의 조언대로 이왕이면 “난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보다는 “나는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자신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도록 다짐하는 계기도 되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참 의미 있는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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