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자의 존재감이 어마 무시 하다며 아마 당신은 우느라 제대로 못 볼지도 모르지만, 이러면서 아내가 같이 보자고 했다.
아내가 울었다. 슈퍼 울트라 극 T의 성향인 아내는 내가 눈물 콧물 다 찍어내는 장면들에서 그런 나를 보며 웃는 사람인데 훌쩍였다. 물론 그런 아내 옆에선 내가 통곡 중이었지만.
어쩌면 아내는 자신의 처지가 해숙과 너무 닮아 있지만, 고단한 일상을 낙준에게 위로받는 해숙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게 위로받지 못하는 처지에 속상해서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르겠다. 또 나는 그렇게 느껴지는 통에 미안하고 안쓰러워 통곡했다.
1화를 보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일방적인 돌봄을 하면서 저렇게 애틋할 수가 있을까. 낙준의 사고 이후 40년을 돌봄 제공자의 삶을 살면서도 가장의 역할을 짊어진 그것도 일수꾼으로 온갖 멸시와 오욕을 견디는 해숙의 한결같음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다 아내를 보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을 때 아내가 말했다.
"우린 정하고 가자. 몇 살로 만나래?"
"이렇게 고생하면서 나를 또 만나려고?"
"그럼 이렇게 고생시켜 놓고 그냥 입 닦으려고? 아픈 거 다 놓고 간다잖아!"
"그럼 당신한테 반했던 스물한 살로 가자!"
사지 멀쩡한 낙준에 비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 해숙의 신체 활동 지수가 안타까워 우린 나이부터 정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해숙의 웃으며 까는 대사는 환상적이었지만 내용은 점점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자꾸 걸렸다.
천국행 열차도 은하철도 999처럼 폼 나는 게 아니라 지하철 2호선을 돌릴 때부터 뭔가 돌고 돌겠구나 예상됐다. 달리 순환선이겠나.
이승에서 저승 가는 건 누구나 가지만 그나마 천국 가는 건 줄 서지 않고 선택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순환선에 타서 돌다 지옥에 끌려갈 망자 다 끌려 나가면 남은 망자가 천국에 간다는 설정은 천국 입성의 기대감을 다 말아 먹었다.
연출자의 범인의 상상을 한 단계 뛰어넘은 고차원의 상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거기선 그냥 살던 대로 살면 사랑과 행복이 마구 넘친다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다.
앨런 라이트먼은 <아인슈타인의 꿈>에서 어쩌면 '인간은 세상 종말이 와야 비로소 평등해 잘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 천국에선 지지고 볶고 다치고 상처받고 좌절했던 온갖 감정을 다 가지고 살았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살아야 하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천국이 이승의 복제판이라면 여기가 지옥 아닐까? 천국에서도 밥을 해 먹고 청소하고 거기다 월급쟁이에 심지어 계급도 존재하다니. 옷만 허여면 천국인 거요?
이승의 잔재를 다 가지고 올라와서는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않으면 지옥으로 보내질 수 있다는 협박을 해대다니, 뭐 지옥에서 지은 죄 달게 받으면 천국으로도 입성할 수 있는 건 나름 공정하다고 생각했으려나? 어디든 제대로 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 방증일지도 모르고.
그나마 천국에 입성하는 게 기도 빨 이나 묻지 마 선행이 아니라 살아온 궤적과 맥락을 살핀다는 건 참 바람직하지만 포도알 6개 정도로 감시하고 교화하는 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고.
또 해숙이 사람들의 마음을 인정사정 없이 후벼 파고도 천국에 올 수 있었던 게 지고지순한 사랑과 츤데레의 발로였다고 쳐도 낙준은 왜 천국에? 휠체어를 타고 뭘 해도 했을 몸으로 침대에만 누워 해숙에게 열심히 측은지심만 날렸는데 어째서?
낙준이란 인물 설정에 감독은 장애에 대해 별생각 없었거나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낙준은 하반신만 마비였는데 왜 와상처럼 누워만 있을까? 휠체어를 타고 얼마든지 나돌아 다니고, 청소에 설거지 같은 집안일이며 회사를 다니거나 별의별 일을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아내에게 꼼짝없이 수발만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인물로 그려졌을까?
해숙을 천국으로 올리려는 장치였다면 낙준이 천국으로 올라갈 명분은? 뒤에 나오려나? 몸이 불편하면 무조건 수동적인 장애인으로 그려지는 게 참 아쉽다.
4화까지 밖에 보지 않은 감상이지만 애초에 천국이 저렇다면야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숙이 아니라면 기대되지 않는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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