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이은재의 감성과 희망의 이야기
작가의 전작 <사랑의 중력>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는 독자가 많았다는 작가의 말에 왠지 덩달아 뿌듯했다. 나 역시 그 독자들 중 하나여서 였을까. 작가의 이토록 따뜻한 진심이 전해지는 글 앞에 요즘 브런치에 글이랍시고 끄적거리고 있는 게 부끄러웠다.
"작가의 소명은 얼마나 현란한 필력으로 글을 잘 쓰느냐에 있지 않고 얼마나 진정성 있는 통찰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p7
나는 글의 아닌 텍스트만 쏟아내고 있는 게 아닌지 반성한다.
"아들, 거기서 후디신 좀 가져와."
"후디신? 후시딘? 엄마, 얘 이름은 후시딘이라니까. 몇 번을 말해."
"어? (웃음) 그거나 그거나 알아들으면 되지."
맞다. 그까짓 이름이 좀 틀리면 어떠랴. 의미만 알아들으면 되는 거지. 맞춤법이 틀리던 어머니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가 내 어머니가 생각나 코 끝이 찡해졌다.
사랑은 작은 우주를 품는 것이라며, 작가는 "언제 지구 밖으로 떨어져 버릴지 모르는 위태로움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그 감미로운 희열에 온 정신을 담그는 것"이라 표현한다. 아, 얼마나 로맨틱한지 어지러울 정도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나는… 한여름의 질척대는 더위보다도 짜증 나고 성가신 존재는 아닐까. 서운해서 괜히 말도 안 되는 자학도 해봅니다."라는 작가의 심정에 명치끝이 콱 메였다.
누구나 다 겪는다는 사춘기를 티도 안 내고 넘어가 준 딸을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몸이 불편한 아빠에게 모질 게 대할 만큼 독하지 못해서 그래서 혼자 삭혀야 했을지 모를 당연한 반항들을 꾹꾹 누르고 참아내고 있었을지 모를 아이의 심정을 헤아려 본 적이 없기에 작가의 이 서운한 마음이 더 신경 쓰여버렸다.
사랑이 고작 화학 작용의 부산물이라며, 변하니까 사랑이라는 작가의 말이 공감이 되면서도 안타까운 이유는 변하거나 말거나 그건 둘째치고 사랑이 그저 과학적으로 설명되어 버려서다.
도파민, 페닐에틸아민, 옥시토신을 거쳐 엔돌핀으로 설명되는 것이 왠지 싫다. 사랑은 그냥 신비롭고 오묘한 그러면서 이성으로는 결코 통제되지 않는 감정의 영역으로 놔두고 싶다. 하여, "사랑이 어떻게 설명이 되니…"라고 하고 싶다.
"인생이란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수용해나가는 과정인데, 뭘 몰라도 너무 몰랐다 싶습니다."라는 작가의 말에 반백년을 살아오면서 아집과 고집을, 오기와 자만을 구분도 못하고 살아온 나를 반성한다. 인생, 참 모를 일이다. 산다는 게 참 버라이어티하지 않은가.
이 책은 작가의 따듯한 말투에서 아니 글투라고 해야 하나? 어쨌거나 작가의 진심이 전해져 위로를 받는다. 젖어든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한 번에 확이 아니라 조금씩 때론 울컥,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위로가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