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

[미술]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by 암시랑

서문을 읽다가 낮은 탄성이 나왔다. 아니 탄식일까.


"예술의 역할은 그런 것인가 싶었다. 그러니까, 엄숙미로 삶의 흥분을 제거하는 것." p10


어린 시절, 정확히는 어느 연령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에 걸린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를 누드화를 보고 성적 반응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 책, 어쩌면 삶의 흥분을 가져올지 모르겠다. 그리고 음침함, 모로, 모더니즘의 작가로 제리코가 기억될지 모르겠다.


충분히 아주 소름 돋을 정도로 충격적인 글이다.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순간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제리코가 삭발까지 하고 8개월을 매달려 그려낸 그림 '메두사 호의 뗏목'을 보고 나서 이처럼 서사적이고 사실적인 글과 표현이 가능할까 싶다. 게다가 미처 깨닫지 못한 의미에 대한 관점 역시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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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호에서 놓아버린 운명의 밧줄은 우리가 잡고 있어야 할 운명의 끈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우린 인육을 뜯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인육으로 뜯어 먹힘을 당할 것인가.


미처 제목의 '사적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못해서였을까. 읽는 내내 작가가 은밀하고도 농짙은 이야기들 그래서 사적이라는 단어는 적당히 야한 혹은 거론되는 화가들의 숨은 이야기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읽다 보면 재미에 푹 빠져든다.


이 책은 제리코, 들라크루아, 쿠르베, 마네, 팡탱, 세잔, 드가, 르동, 보나르, 뷔야르, 발로통, 브라크, 마그리트, 올든버그, 프로이트, 호지킨 그리고 이것은 예술인가?를 묻게 되는 작가들의 작품 세계와 사적인 이야기를 작가의 아주 사적인 관점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그들의 다툼은 필수적이고도 필사적인 것이었던 듯하다." p77


고백하자면 작가가 아주 사적으로 거론하는 작가(화가)들 대부분은 알지 못한다. 과거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미술이란 교과서를 외우는 일이 다였다. 그래서 작가가 말하는 작가가 생소하다. 그렇다고 마네나 세잔, 드가, 프로이트 같은 작가들도 안다고 하기엔 부끄럽다. 그저 이름을 들어 본, 그들의 그림을 보았다는 정도지만. 아, 프로이트는 그가 그림을 이리도 잘 그리는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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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수 없는 두려움에 뿌리를 둔 경멸." p106


그나마 아는 척이라도 할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를 두고 당시 관객들의 거센 항의와 멸시에도 보여 줄 것들을 다 보여주고만 모네의 이야기나 역시 처음 듣다시피한 팡테는 21년 동안 단 4점의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 군상들은 묘한 끌림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을 팽개쳐버리는 예술가들이나 정신이 이상해져서, 혹은 그냥 스스로 목숨을 끊는 화가들보다 훨씬 큰 감동을 주는 본보기다.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대담한 자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p161


15장에서 진지하게 묻고 있는 '이것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의 근원이 1997년보다 거의 100년 전에 폴 리쉐가 떴던 조소 '운동 실조증에 걸린 비너스'가 실린 페이지를 보고 식겁했다. 이것은 과연 작품일까? 조형물일까? 역시 결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전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밀랍으로 뜬 '바넘 서커스 단원이었던 거인의 손'의 예술가의 반응이 개인적으로는 예술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하게 만든다. 그는 오만하고 달갑지 않아 보인다.


"내가 예술가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술이고,
따라서 내가 하는 건 무엇이든 예술이다." p345


이 얼마나 재수 없는가. 예술가는 무슨 개뿔!


이 책은 예술, 그중에 미술을 잘 모른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단순하게 그림에 대한 평단의 이야기나 해석들을 옮기는 따분한 책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없이 '나는 그렇다'라는 아주 개인적인 생각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뛰어난 필력을 앞세워 작품의 작가들의 사적인 이야기들까지 '그랬을 것 같지 않아?'라는 듯하게 독자와 공감하고 있다.


"미술관을 산책하며 작품과 화가에 대한 수준급 미술 에세이를 한자리에서 재미있게 두루 읽기 원한다면 이만한 책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옮긴 이의 말'에는 백만 배 공감한다. 그리고 감히 추천한다. 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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