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3⌟ 홍해의 햇살아래, 얀부 캠프
-밀물|1979년 12월호|건설인의 다짐|박동규|해건협 회장-
▬“박통이 죽었대”
원청사 Head Office에서 근무하던 천안공고 출신 춘수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믿기지 않는 듯한 말투였다.
“어젯밤에, 김 부장이 쏜 총 맞고 죽었단다야.”
그 소식은 영국인 감독관에게서 들은 뉴스였다. 회사에서는 아무런 공식 발표 없이 며칠이 흘렀고, 1979년 10월 26일의 비극은 점차 현실로 다가왔다. 중동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은 말없이 침묵했다.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나라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현장을 감돌았다.
시골 어르신들과 막걸리를 나누고, 어린 기능공을 찾아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푸른 집 잔디밭에서 세 자녀와 배드민턴을 즐기던, 대통령 각하였다. 모두들 반신 반의 한다.
"나라님이 그러셨다고요...? 설마요. 그럴 리가요.”
여가수를 부르고, 여대생을 부르고 술자리를 했을까. 나라님은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되고 불멸의 지도자로 학습되어 온 공고생에게,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고,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원조 "구국의 결단"
나라님은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기인 18년을 통치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을 시작으로 1979년 10·26 사건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초심은 어디 가고, 3선 개헌, 유신헌법을 만들어 18년을 통치한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고, 급속한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업적은 장기 집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나라를 세운 박사님이 4·19 혁명으로 물러난다.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은 정치적 혼란과 경제 침체로 국민 불만이 고조되자, 1961년 5월 16일 구국의 결단으로 박소장을 중심으로 군사 정변을 일으킨다. 정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해 입법·행정·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군부는 "과업이 성취되면 민정에 이양하겠다"라고 공수표를 날린다. 별이 네 개로 승승장구한 박소장은, 전역 후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 1963년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후 수십 년간 구국의 결단으로 또 이 저리 군부 정치의 서막이다.
1967년 5.3 대선에서는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6대 대통령 당선된다. 또, 1971년 4월 28일 DJ선생님을 누르고 제7대 대통령 당선된다. 어~~~ 재선이 마지막 아닌가? 그렇다. 방법이 있다. 1969년 9월 14일 야당의원 몰래 새벽 2시 50분에 공화당이 3선 개헌안 가결 시킨 것이다. 든든한 아들도 있고, 아무래도 종신 대통령이 좋을 것 같아 또 구국의 결단을 한다. 1972년 10월 유신이다. 어머 마한 권한을 부여한다. 대통령에게 무제한 연임권과 국회 해산권 부여 하는 것이다.
하나 더 있다.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 간접 선출 하는 것이다. 대통령임기 6년, 대통령을 간접 선거하는 통일주최국민회의 신설한다. 대통령 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1972년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 취임 ( 유신 1기) 하고, 1978년 7월 6일 9대 대통령 당선( 유신 2기) 된다. 그러다가 총을 맞았다. 구국의 결단으로 만든, "체육관 대통령 뽑기"는 11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앞머리가 시원한 전 소장님에게 꽃길을 만들어 준 것이다.
비극의 시작은 "구국의 결단"이다. 가족의 비극은 1974년 8월 15일, 한 마리 학이라 칭송하던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 동포 문 씨가 쏜 총탄에 쓰러지면서부터이다. 광복 경축사를 하던 각하는 재빨리 연단뒤로 몸을 숨겼지만,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사가 총을 맞은 것이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고, 민족의 어머니라 부르며 따르던 여인네들은 울다가 지쳐 기절을 한다. 그 이후 총명하던 각하가 외로운 밤이 싫어 안가에서 여흥을 찾는 일 많아지고, 눈치 빠른 경호실장이 사사건건 국가 대소사에 개입하니, 또 다른 "구국의 결단"으로 부장님이 거사를 한 것이다.
▬중동 방문의 꿈
대통령 각하는 재임 18년 동안 공식 해외 순방을 단 7차례만 다녀왔다. 반면, 반토막 검사 대통령님은 2022년 5월 취임 이후 불과 3년 만에 25개국을 16회 순방했다고 하니, 누가 더 잘한 것인지는 판단이 쉽지 않다. 국내에서 인기가 많으면 안방투수가 되고, 인기가 없으면 떠돌이가 되는 모양이다. “오일쇼크로 부자가 된 중동에서 처방책을 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하며 중동 진출 전략을 구상했던 대통령 각하였지만, 정작 중동 땅은 밟지 못했다. 다만, “오일 달러를 잡으려면 중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에 따라 이란의 팔레비 국왕에게 서울 방문을 요청했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대해서도 단계적 승인 방침을 밝히는 등 중동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통령 각하의 전략은 직접적인 국빈 방문이라기보다는, 중동 진출을 위한 전략적 외교와 정책적 지원의 일환으로 정부 고위 인사들을 대타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오일쇼크 이후 중동 건설시장 진출은 유신 정부의 핵심 경제 전략 중 하나로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을 독려한다. 여기저기 간곡한 요청에, 등 떠밀린 대통령 각하는 1979년 12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공식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10월 26일,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라는 명언을 남긴 구국의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부친의 유업, 그 꿈은 대통령 각하의 영애|令愛|가 이룬다. 2015년 3월 1일부터 영애님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4개국을 순방했다. 이번 순방은 특히 중동 진출 40여 년과 해외건설 5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며, 부친의 위업을 이어받아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키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게 주최 측 발표이다.
또한, 샤일라|아랍식 머리 쓰게|가 잘 어울리는 영애 대통령은 2016년 5월 1일부터 3일까지 이란을 국빈 방문한다. 이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의 이란 방문이자, 수교 54년 만에 이루어진 국빈 방문이다. 영애는 이란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와의 면담에서 이라크-이란 전쟁 중에도 공사를 완수한 D산업의 사례를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의리를 강조한다. 국민의 목숨보다 의리를 중요시하는 대한민국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총 수주 10조 원 달하는 가계약의 성과를 이룬다.
▬좋은 대통령 그리고 고마운 각하
우리나라 국민이 뽑은 좋은 대통령 1위는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정성 있는 소통능력과 개혁에 대한 노력이 평가를 받는가 보다. 2위는 대통령 각하이다. 18년을 권좌에서 보낸, 장기 집권이라는 핸디캡에도, 산업 근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성과덕에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대통령 각하의 ‘최후의 만찬’을 지켜본 여대생은, 그를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훌륭한 분”이라 평가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했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물론 지역 불균형 발전에 따른 갈등, 민주세력 탄압, 유신독재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래도 공고생에게는 고마운 대통령 각하였다. 오일달러를 벌고, 병역 혜택을 받고 그리고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써 자부심을 갖게 해 주었다.
만약이다. 그가 10월 유신이라는 악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학처럼 고운 여사와 예쁜 두 딸 출가 시키고 그리고 영식 군과 행복한 가정을 건사하는 해피 엔딩이지 않았을까? 더구나 한국의 민주화를 20년은 후퇴시킨 앞이마가 시원한 전 장군도 전역 후 고향 합천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놈의 "구국의 결단"만 아니었다면, 대통령 각하는 고마운 대통령과 좋은 대통령 2관왕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및 인용 관련 정보는 머리글에 게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