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의 나라 |철도 여행|을 꿈꾼다.

어느 철도 전문가의 태국 에피소드

by 아문선
태국에서의 철도사업도 25년이다


방콕사무소 창 너머 후아롬퐁역 은 밤엔 쪽빛 조명을 받는 우아한 신 르네상스풍의 건축물이다. 1916년 완공한 역사로, 반 원통형 지붕을 많은 원형 기둥이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대합실에 뿌려지는 햇살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걸어 들어와 철도 여행의 설렘을 말하고 있다.


서울역 대합실 크기와 비슷한 역내에는 세련된 20여 개의 나무 의자가 배치된 승려 구역과, 100여 개의 플라스틱 의자가 설치된 일반 구역으로 구분된다. 대합실 양측엔 여행의 별미, 작은 스낵 코너가 즐비하다. 대합실 바닥에 반쯤 누워 열차를 기다리는 유럽의 배낭족들을 보면 차창 가로 스칠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후아람퐁 역은 북쪽으로는 골든 트라이앵글, 남쪽으로는 말레이시아 접경, 동쪽으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접경, 서쪽으로는 미얀마 국경도시로 연결하는 태국의 중앙역이다.


근래 역 주변에는 새로운 목적을 갖는 사람들로 붐빈다.

곧 다시 볼 수 없어질 105년의 나이테를 지닌 후아람퐁 역을 배경으로 인생 샷을 찍는 사람들이다. 지난해 12월, 후아람퐁 역을 폐쇄하고 주변을 상업 지역으로 개발한다는 뉴스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업체가 Global 시장을 목표로 개발하여 설치한 전자 연동장치가 후아람퐁 역 재개발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전자 연동장치|란 철도역 내 및 역간 열차 운행을 제어하는 Computer 설비를 말한다. 이 전자 연동장치가 바로 거미줄처럼 복잡한 선로에서 열차의 안전 이동을 책임지는 비밀이다.


손익이 좋고 시스템해외사업 시장개척의 기횝니다.


외환위기가 잊혀 가고, 밀레니엄시대에 들뜬 시점이다. 그룹 계열사인 L상사 방콕지사로부터 BANGSU 역에서 북부 BAN PACHI 역간 14개 역사에 전자연동장치를 공급하는 입찰 정보를 받는다. 당시 우리의 기술은 독일 지멘스나 프랑스 알스톰 등 선집 업체와 경쟁을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L 사 연구소에서 개발한 초도 제품이 있긴 하나 개발 직후 납품한 대전역에서 큰 장애를 일으켜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입찰 마감 직전까지도 사업 참여 여부에 대해 반론이 분분하다. 경영기획실장의 설득으로 깐깐한 CFO 및 CEO의 결재가 이루어진다.


판세가 이상하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입찰 평가는 진행되고 강력한 수주 예상 업체인 호주 WESTINGHOUSE 사가 SPARE 수량 부족으로 탈락하고, 2nd LOWEST 업체인 한국의 L 사가 계약 우선 협상업체로 선정된다. WESTINGHOUS가 수주하리라 신념에 찬 신호국장의 분노는 나를 힘들게 한다. L 사의 실적과 서류에 확인이 필요하다며 계약 전 실사단을 한국에 파견한다. 태국철도청 책임자, 영국인 감리로 구성된 실사단은 한국 철도 공사, 철도기술연구원 그리고 L 사 천안공장을 방문 조사한다. 컨소시엄 파트너사의 눈부신 영업활동과 우리의 배짱은 해외 철도사업 서막을 알리는 이정표가 된다.


신호국장의 분노는 사업 수행 기간 내 이어진다.

영국인 감리를 앞세워 설계도서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승인 거부가 일상이다. 신호국장이 주관하는 공정회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공기가 반환점을 지나도록 제품 승인이 거부된다. 제품 생산이 불가하고 납기 내 준공은 어려운 처지이다. 모든 문제는 감리와 논하라는 단호한 신호국장 사무실 앞 대기한다. 38개월 공기를 고려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온종일 신호국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를 보다 못해 면담이 허락된다.


"국장님" 오케이 할 때까지 현장시험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완제품을 생산하고 태국에서 철도청 및 감리사 입회 하에 모든 시험을 재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승인을 요청하였다. 3개월에 걸친 태국 현장 재시험 후 랑짓 RANGJIT 역 절체를 시작한다. |절체| 란 기존 설비를 철거하고 새로운 설비로 교체하는 과업이다. 제품 단위시험, 결선 시험, 연동 시험 등의 15일간의 절체 공정이 끝나고 태국철도청은 ACCEPTANCE CERTIFICATE를 발행한다. 전자연동장치는 통상 10~15년이면 교체하거나 큰 유지보수가 필요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문제가 없다.


L사의 전자연동장치는 태국 철도청의 전설이다.

태국에는 이 밖에도 지난 20여 년간 열차 통합관제센터와 북부 구간, 북동부 구간, 동부 구간 등 한국의 전자 연동 장치가 70여 곳에서 숨 쉬고 있다. 시암 왕국의 고도 아유타 Ayutthaya, 아름다운 휴양도시 파타야 Pattaya, 캄보디아 국경 도시 아란야프라텟 Aranyaprathet, 태국 맛의 고향 이싼 Esan 등 70여 곳이다. 시쳇말로 태국에서 한국 기술을 밟지 않고 태국 철도여행을 못 한다고 할 수 있다.

20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북부 노선 14개 역 노선에는 UNESCO 세계 문화유산인 아유타 역사 공원의 관문 아유타 역이 있다. 우리의 경주나 부여를 연상할 수 있는 이 도시는 AD 1350년에서 AD 1767년까지 417년간 시암 왕국의 수도였다.


신혼여행 또는 효도 관광으로 한 번쯤 여행했을 가성비 좋은 동남아 여행지 파타야 Pattaya로 가는 길인 동남부선에도 K-철도 기술이 함께하고 있다. 타이거 공원이 있는 스리 라차Sri Racha, 국제물류의 허브 람차방 Leam Chabang, 동남부 땅끝 마을 사따힙Sattahip까지 한국의 전자 연동장치가 설치되면 파타야 해안을 따라 설렁설렁 달리는 철도 여행도 가능해질 것이다.


태국과 캄보디아와 국경무역이 활발한 아란야프라텟 Aranyaprathet을 잇는 동부선 14개 역 구간도 최근에 개통한다. 국경 카지노 리조트에서 잭팟을 터트리거나, 단돈 300 Bath*로 상하의 한 벌 구할 수도 있는 아란야프라텟도 여행자 버킷 리스트에 올려보자. 태국 맛의 고향 이싼 지방도 흥미로운 여행지이다. 한국의 기술이 이싼 지방의 심장 나콘 랏차시마Nakhon Ratchashima를 연결한다. 해바라기 축제와 촉차이 목장이 있는 사라부리Saraburi를 거처 나콘 랏차시마에 이르는 노선은 보기 드문 산악 구간이다. 긴 호흡으로 이싼 지방 철도 여행을 한다면 태국이 자랑하는 맛 솜땀*도 곁들이시기를 추천한다.

*Bath: 태국 화폐단위 약 37원/Bath

*솜땀: 파파야, 액젓, 땅콩 등으로 만든 태국식 샐러드


미소의 나라 │철도 여행│을 떠나자


콰이강을 지나는 |죽음의 철도|, 철길이 열리는 |매끄렁 시장|, 파삭 촌라짓 댐을 가로지르는 |호수 열차|, 지면에 미처 담지 못한 여행지에도 믿음직한 한국의 철도 기술이 길잡이가 될 것이다. 둔탁한 나무 의자에 여행자의 피로를 의지하고, 쉬엄쉬엄 스치는 철도역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의 철도기술에 시원한 미소로 답례하자. 후아람퐁 역과 함께했던 한국의 철도 기술이 그곳에서 사라질지라도, 박물관에 남아 한국 철도사업을 응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