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걷는 글

VOL.1 / 2023. 2월호. 시화로 전하는 시_2

by 숨 빗소리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글에도 걸음이 있다


눈 뜨자마자 읽는 시 한 편은 묵정밭을 지나 들길을 산책할 때의 속도로 나른하다 걷다 눈에 띄는 들풀이 있으면 쪼그려 앉아 들여다보고, 시냇물 건널 땐 폴짝 리듬을 타고, 시의 걸음은 비교적 완보다 거친 유세 문구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발을 삐기 십상이다 경사가 심하고 뾰족한 바윗길이어서 보폭을 줄이고 신중히 걸어야 한다


엄마 유품을 정리하며 일기를 만난 적 있다

관절염으로 자가 되어버린 엄마의 일기는 몇 발짝 가다 쉬고, 한숨 몇 번 쉬다 걸었나 보다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내용은 반복이다


내 걱정은... 마라... 밥은... 꼭... 꼭... 챙겨 먹고...

보내준... 돈... 고맙고... 미안... 하다




- 고경숙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중 <천천히 걷는 글> 전문




글을 걸음으로 비유하자면 시(詩)는 천천히 띄엄띄엄 나아가는 완보에 가까울 것입니다. 걷다가 문득 맑게 갠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정다운 이웃에게 인사하며 말을 건넬 때,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어느 슬픈 골목 아래 하얀 한 송이 국화를 바칠 때... 그럴 때 우리는 멈출 수밖에 없고 그때 우리의 길과 걸음은 한없이 느려집니다.


우리의 걸음은 때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기도 하고, 텅 빈 행간처럼 걷다가 멈춰 지나온 인생의 발자국을 헤아려보는 눈 쌓인 벤치가 되기도 합니다.


바쁘게 스쳐가는 수많은 걸음들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한없이 느려질 때

그럴 때 우리는 느린 걸음, 완보의 시 한 편이 되는 것인가요. 골목의 가로등처럼 쓸쓸하지만 눈부신 뒤쳐짐, 천천히 걷는 한 편의 글이 되는 중이라고. 내가 나를 멈춰 세워, 나 자신을 느리게, 내 인생의 문장들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는 중이라고.





<숨 빗소리_ 2월_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는 수시로 업데이트됩니다. 공동 필진 4인의 신작원고는 예고대로 진행됩니다.)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용 시 - 고경숙 <천천히 걷는 글>

고경숙 시인 - 2001년 시현실 등단. 수주문학상, 두레문학상 등 수상.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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