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 인겐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은 호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이 자신의 오랜 목표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다양한 준비과정, 실제 순례길 여행기를 매월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 연재합니다.
2023년 4월 8일
안녕하세요 인겐입니다.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을 준비하며 여러 가지 고민들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죠. ‘1년이라는 남은 기간 동안 무엇을 준비해야 이 여정을 차질 없이, 그리고 충분히 가치 있게 보낼 수 있을까?’ ‘먼 나라 스페인에서 800km를 넘게 걷는 동안,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산티아고를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실 이번 스페인 여정은 유럽으로 향하는 저의 첫발입니다. 그래서인지 여정에서의 시간 분배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주어진 휴가기간 동안 지금껏 미뤄둔 to-do-list의 많은 것들을 최대한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티아고 여정에서 하고 싶은 일들, 그리고 여정을 마친 후의 또 다른 계획들을 생각하면 시간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산티아고 여정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어머니와 함께 유럽을 돌아다니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유럽에 발을 디뎌 보신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께는 산티아고 같은 고생스러운 여행길 말고, 아들과 함께 하는 휴식 같은 여행을 선물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 편안한 여행기도 부록처럼 올릴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많은 계획과 소망들은 제 산티아고 여정을 조금 더 피곤하게 만들 듯합니다. 대략 35일이면 순례길을 다녀올 수 있는 일반적인 페이스보다 더 빠른 시간 내에 (약 20여 일) 마쳐야, 남은 시간에 어머니와 여행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현재 제게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강인한 체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10대, 20대처럼 에너지가 늘 샘솟는 나이는 아니지만 아직도 체력은 자신이 있습니다. 지난 2년여간 꾸준히 클라이밍- 사이클링- 헬스 같은 운동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제시한 순서는 제가 좋아하는 운동 순입니다.) 클라이밍은 잘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휴가 때도 종종 했고, 일본에 여행을 가서도 했습니다. 심지어 싱가포르에서 환승을 하는 중간에도 할 정도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번 순례길에서도 큰 도시에 들를 때마다 현지 클라이밍을 체험할 계획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산티아고 여행 준비를 시작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제 운동 루틴의 변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체력 강화를 위해 56km 트레일 러닝* 대회 참가를 현재 계획하고 있습니다. 먼저 56km 트레일 러닝 대회 준비를 위해 식단에 변화를 주었고 음식 섭취량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체중감량이 다소 필요했거든요. 유산소 운동을 위한 러닝은 헬스장뿐만 아니라 산악지형과 같은 여러 곳에서 두루두루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비포장도로를 걷는 일이 대부분이고, 언덕, 자갈길, 흙탕길, 산길, 밭길, 갈대길 등 다양한 높낮이의 지표면을 걸어야 하는 일이 허다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준비로 트레일 러닝보다 최적의 운동은 아마 찾기 힘들 것입니다.
* 트레일 러닝 :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나 트랙이 아닌 산이나 초원, 숲길 등 자연 속을 달리는 운동이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들어 산악마라톤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았으며, 이후 관련 대회가 잇달아 열리면서 그 인기가 높아졌다.
어떤 운동이든 그 시작이 정말 고되다는 것에 공감을 할 것입니다. 트레일 러닝의 시작은 그보다도 조금 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애들레이드라는 호주의 작은 도시는 한국처럼 가까운 곳에 산이 많지 않습니다. 호주 토지는 아웃백이라는, 사막과 유사한 황무지가 중앙에 특히 넓게 분포하고 있습니다. 물론 초록으로 우거진 넓은 산들도 군데군데 퍼져있지만, 차로 몇 시간을 달려도 산을 찾아보기 힘든 곳이 많습니다. 제가 대회에서 달릴 56km는 그나마 도시에서 가까운 빌레어-클리랜드-모리알타-블랙힐의 능선을 따라 이어져있죠.
트레일 러닝 대회를 위한 훈련 과정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산속 길을 달리는 그 거친 질감은 여행이라기보다는 모험과 도전에 가까웠습니다. 금방 피곤해지고 지치더군요. 하지만 루트를 한 번 시작한 이상,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돌아가기도 어렵습니다. 돌아가기도 애매한 중간 지점에 들어서면 이내 ‘아니, 내가 왜 이 ‘짓’을 시작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사가 심한 언덕길에서 정신을 놓아서 일까요, 몸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일단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놀라운 것은 정상 즈음에 다다라 맛보는 진풍경은 금방 이 ‘짓’의 의미를 찾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등산러들이 얘기하는 그 ‘맛’을 잠시나마 엿보는 시간입니다.
산의 놀라움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같은 길을 되돌아가면 정말 새로운 장소에 들어서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해가 뜨고 지는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산의 풍경은 마냥 새롭기만 합니다. 정오의 햇빛을 받아 초록으로 반짝이던 이파리들이 해 질 녘에는 어딘가 음산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미세한 풍경의 변화는 아마도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울 것입니다.
과거의 저는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즘은 호주의 자연 속에서 클라이밍을 하고 걷기나 달리기를 마다하지 않지만, 한국에서 살던 때의 산행은 동네 뒷산에 올라갔다 내려와 마시는 막걸리가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겪는 다양한 경험들 모두가 즐겁고 새로운 자극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운동은 제게 일정하게 조금씩 무언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짧게는 하루, 한 주, 한 달, 길게는 석 달, 반년, 혹은 여러 해에 걸쳐 계획과 이행, 수정을 반복하면서 얻어지는 ‘단단함’입니다. 그것은 제 삶을 좀 더 견고하게 지탱하고, 다가올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마음과 몸의 주축이 된다고 믿습니다. 한국을 떠나 이민자의 삶을 걸으면서 그 '단단함'은 삶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초석이 되어왔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와 배움을 겪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변화와 배움을 위한 기회에 게을리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제 자신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야 할 때, 물러서야 할 때와 돌아서야 할 때, 혹은 멈춰 서야 할 때를 만날 것입니다.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지속적으로 제 자신을 유지 혹은 성장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다가 자신이 세운 목표 앞에 문득 서게 되었을 때, 압도당하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압니다. 이 모든 것들의 중요성을…. 저의 모든 준비과정이(이 글 역시도!) 제 순례자의 길을 차질 없이 마무리하도록 도와주는 소중한 길라잡이가 되어주길 소망해 봅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 끝)
<숨 빗소리_ 4월 신작원고_인겐의 여행 산문> _ 여행 산문은 4-5주 주기로 업데이트됩니다.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