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책

VOL.3 / 2023. 4월호. 시화로 전하는 시_8

by 숨 빗소리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 남진우 <타오르는 책> 전문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을 때가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며 읽어나가는 책들. 그러나 내가 기억하던 문장은 분명 이게 아니었는데. 놀라며, 의아해하며 읽어나갈 때 나는 그 앞에서 주춤거립니다. 책과 그 속의 문장들이 변한 것은 아닐 텐데, 예전과는 다르게 읽힌다는 것은 분명 나란 존재가 세월의 강물과 함께 변한 탓이겠지요. 이미 타서 재가 되어 버린 문장들은 지금의 내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겠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갈수록 후자의 경우가 나를 더 살게 합니다. 무심코 지나갔던 풍경이 마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나는 기뻐합니다.


사람도 그러할 때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모두 읽거나 알 수 없겠지만, 스쳐가는 저 한 명 한 명의 표지를 넘기면 어떤 문장들을 담고 있을지 상상할 때가. 지나간 책의 문장들처럼 과거의 내가 만난 사람들도 그때 만난 그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변하고 나도 변하여 뒤늦게 밑줄을 치게 될지도요. 흐름과 변화가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 변화의 가능성이 오히려 생을 푸르게 할 때 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에서 작은 이파리가 돋아나듯이,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서 내 마음속 새롭게 피어나는 또 다른 문장들이 있으니…


‘나’라는 한 권의 책도

과거 내가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게서 흐르는 책의 강물처럼 새롭게, 새롭게 흘러가기를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상상되기를_




<숨 빗소리_ 4월_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

('시화로 전하는 한 편의 시'는 수시로 업데이트됩니다. )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용 시집 - 남진우 <타오르는 책> 문학과 지성사, 2000

남진우 시인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김달진문학상, 김종삼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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