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과의 약속 장소는 오거리 골목 안쪽에 위치한 빈대떡집이었다. 그곳은 칠십 대 노부부가 운영하는 열 평 남짓한 작은 선술집이었다. L은 막걸리 애호가이기도 했지만 동네 노인들만이 들락거릴 것 같은 그런 낡고 구수한 장소를 좋아했다. H가 술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이미 도착한 L이 가장 안쪽구석 테이블에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벌써 이미 한 잔 한 분위기인데, 요 쪼그만 장소에서 설마 못 찾을까 봐 손 흔드는 겨?”
“에이, 형님은 무슨. 그냥 반가움의 인사죠, 인사.”
녹두빈대떡과 도토리묵 무침을 주문했지만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둘은 술잔에 막걸리를 가득 따랐다.
“형님, 오늘은 제가 한 손으로만 술잔 들어도 이해해 주세요.”
“아니 뭐 그런 걸 따지겠어? 근데 왜? 손 다쳤어?”
L의 오른손을 보니 흰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며칠 전 술병이 깨져 그것을 치우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베었단다. 운이 나빴는지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네다섯 바늘이나 꿰맸다고.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술을 마셨길래 술병에 손가락을 베인 거야? 집에서 마시다가?”
“아, 이게 얘기하자면 좀 길어질 수도 있는데요. 일단 한 잔 마시죠, 형님.”
“근데 상처 꿰매고 술 마시면 늦게 낫는 거 아냐?”
“그거 다 잘못된 상식이래요. 담배면 몰라도 술은 관계없대요. 의사들이 환자들한테 수술받고 나서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 건, 술 취해서 또 수술할 사건 만들까 봐 그러는 거래요. 상처 위에 또 상처 만들까 봐.”
“그럴싸한 말이군.”
2
며칠 전 L은 소설을 마감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싸매다가 겨우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니 술 한 잔 생각이 났다. 시계를 보니 이미 새벽 한 시. 집 앞 편의점에 가서 과자 한 봉지와 진로 포도주 한 병을 샀다. 방에 돌아와 보니 책과 낱장의 자료들로 책상이 온통 엉망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잠들었으므로 서재로 쓰는 이 방에서 책상을 술상 삼아 술을 마셔야 했다. 그래서 L은 사온 포도주를 책상 구석에 올려두고 부리나케 책상 정리를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서둘렀던 탓인가. 급하게 몸을 움직이다가 자신도 모르게 구석에 올려둔 포도주병을 팔꿈치로 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포도주병은 바닥에 떨어지고, 특유의 얇은 유리로 만들어진 진로 포도주병은 그대로 깨져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 선홍빛 방울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3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술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지요. 뒷수습을 해야 했으니까. 바닥에 흘린 포도주야 그냥 닦아내면 되는데, 아 웬걸. 책상 아래에 아끼던 가방 하나가 있었는데, 유리조각과 포도주 얼룩을 그 가방이 그대로 뒤집어써버렸죠.”
그날 L은 왜 그렇게 모든 일에 서둘렀는지. 깨진 유리파편을 급하게 치우다가 손이 베이고, 응급실에 가서 베인 손가락을 꿰맸다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했다.
“손가락을 꿰매고 집에 돌아와 보니 세 시가 넘었죠. 유리조각들은 다 치웠지만 가방은 도저히 수습이 안 됐어요. 결국 버렸죠 뭐. 아, 오래된 추억의 가방이었는데.”
“무슨 오래된 추억?”
“첫사랑이 선물해 준 가방이었어요.”
“아니,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걸 여태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모르겠어요. 그 가방만큼은 제가 진짜 좋아했어요. 참 오랫동안 메고 다녔었는데.”
첫사랑과 헤어지고 나서도 L은 그 가방을 언제나 메고 다녔다고 한다. 등산을 갈 때도, 나들이를 갈 때도 가방은 늘 함께 했다고. 그러다가 고친 지퍼가 계속 고장이 나서 결국 서류들을 담아 책상 밑에 놓아두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난 거 있죠. 그런 일을 치르고 나서 가방을 결국 버렸는데, 다음날 첫사랑이 꿈에서 나온 거예요. 몇 년 동안 그런 일이 없었는데…….”
꿈을 꾸는 동안 행복했었다고. 가방도 버리고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나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었다고 L은 말했다.
“제가 버린 그 가방이, 혹시 그 사람을 편안하게 했던 건 아니었을까요?”
L은 손가락에 흉터가 생기더라도 그날 일을 기억하게 될 거 같아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 말은 들은 H는 진짜 진상이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L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작은 선인장들을 모아서 키운 적이 있어요. 한 선인장 안쪽에 움푹 파인 상처가 있는 걸 나중에 발견했어요. 뭐 신경 쓰지 않고 키웠는데, 나중에 그것들이 자라고 보니 전부다 비슷한데 상처가 함께 커진 그 선인장만 구별이 되는 거예요. 그 상처가 너를 기억하게 하는구나, 너로서 존재하게 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죠. 제 손가락의 이 상처도 언젠가 추억의 가방을 버린 한 남자를, 그날의 새벽을 기억하고 존재하게 할 거예요.”
역시 소설가다운 논리라고 H는 놀리듯 말했지만, L의 그 말들은 며칠이 지나서도 H의 기억에 남았다.
4
H는 캄캄한 방 책상에 앉아 탁상용 전등을 켰다. 며칠 전, 버린 가방과 상처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던 L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과 지금보다 행복해했을 더 젊은 시절의 L의 표정을 상상했다. H는 그를 위해서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시를 그에게 읽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남자의 가방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한 번도
담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가방
그것을 꿈꾸는 가방
아무것도 담지 않은 가방
그 무엇으로도 가득 담은 가방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닌
완전히 갖는 것도 아닌
지퍼가 고장난 가방
고쳐지기를 포기하지 않는 가방
가방을 준 이를 잊으려는 가방
영영 잊지 못하는 가방
간밤 포도주 병을 실수로 깨뜨려
꽃처럼 펼쳐진 붉은 피와
유리조각을 흠뻑 뒤집어쓴
바닥의 낡고 오래된 가방
몇 해가 지나도 생생한
그러나 언제나 헌 것 같은
의미 없는 가방
가방을 메고 느림보가 되는 가방
들썩이도록 뛰며 달아나는 가방
뭐 이런 문장 따위를 가득 적은
노트를 가방 안에 넣어두었는데
어딘가에 두고 온 가방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모르는, 몰랐으면 하는 가방
꿈속에 그 가방이 나왔다고 한다
가방 안 오래전 잃어버린 한 사람이...
아주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는
거짓말하는 가방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가방 안 가장 깊숙이
넣어두었다는
허나 영영 버려진 가방 덕분에
편안해졌을까, 꿈속의 가방
가방 속의 가방
* 이 짧은 소설과 시는 이창호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 실린 글 <추억이 담긴 가방을 버렸다>를 읽고서 영감을 받아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