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VOL.8 / 2023. 9월호. 인겐의 여행산문_7

by 숨 빗소리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

- 인겐


<산티아고를 향한 여정>은 호주에 정착한 한국 청년이 자신의 오랜 목표인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기 위한 다양한 준비과정, 실제 순례길 여행기를 매월 짧은 이야기 속에 담아 연재합니다.




2023년 9월 1일


클라이밍을 마치고 우리는 캠핑장에 돌아왔습니다. 쉴 시간은 없습니다. 가까운 도시 호샴으로 가서 부족한 와인과 장작을 사서 돌아오니 이미 해가 어둑어둑, 산골짜기의 밤은 언제나 한 발 앞서 옵니다. 호주에는 검트리라는 나무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레드검트리가 장작으로 최고라고 친구가 이야기합니다. 거침없이 불 속에 새로운 장작을 넣으니 어느새 불길이 한결 거세져 있습니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자 우리는 배가 매우 고파졌습니다. 밤이 가라앉고, 저녁을 손에 든 우리는 다시 불 앞에 모여 앉았습니다. 와인을 한 모금씩 마시며 오늘의 여정과 내일의 일정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정말 아무래도 다 좋다는 마음으로 그 어떤 모험도 즐길 자세가 되어있었습니다.

밤이 늦을수록 대화주제는 우리의 지난 시간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따듯한 불과 와인 앞에서 우리는 마치 무장해제가 된 듯했습니다. 원래는 술을 잘 먹지 않는 친구가 번다버그(bundaberg)라는 독한 럼주를 꺼냅니다. 이 술은 사탕수수를 이용해서 만드는 호주의 대표적인 럼주입니다. 집에서 아껴먹으려고 찻장 속에 넣어두었던 것을 이번 여행에서 분위기 맞춰 마시려고 챙겨 왔다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뒷정리를 하고 이만 잠을 청했습니다. 시간을 꾹꾹 눌러 담은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집니다. 보슬비를 맞는 나무들은 마치 타악기처럼 음률을 만들어 냈고, 이내 친구들의 코 고는 소리도 잘 가려주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 우리는 캥거루 대신 보슬비와 먼저 인사를 나눴습니다. 캠핑장 군데군데 물 웅덩이를 만든 것을 보아, 아무래도 밤새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가볍게 커피와 아침을 먹고 짐 정리를 시작합니다. 한결 가벼워진 짐을 챙기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짐정리가 끝날 무렵, 친구의 와이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저녁약속이 잡혔으니 일찍 올 수 있냐는 질문이었지만,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섣부른 판단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수긍했습니다. 이 저녁약속 때문이 아니라, 보슬비 때문에 클라이밍은 다음번에 오면 다시 하기로.

대신 아직 시간이 남아있어서 미리 봐뒀던 가까운 산을 탐험하기로 했습니다. 다음번에 도착하면 바로 클라이밍을 즐길 수 있도록 사전답사를 가보자는 숨은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향한 곳은 Mt. Stapylton과 한 자락, Taipan Wall입니다. 사실 이 Taipan wall은 우리 옆자리에서 캠핑하던 다른 클라이머들에게서 얻은 정보입니다. 가까운 위치에 있는 안성맞춤의 탐험을 모른 채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가벼워진 만큼 신나서 더 덜컹거리는 트레일러가 우리의 마지막 여정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한적한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널따란 공간에 차량 두어 대뿐이었습니다. 가벼운 먹거리들을 가방 안에 싣고 우리는 안내지도를 읽은 뒤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이 제법 세차게 부는데도 구름이 떠내려가지 않고 산을 꼭 껴안은 날입니다. 제법 큰 하나의 바위산이라는 것을 바로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흙길보다는 큰 바위 위를 걷는다고 느껴졌습니다. 보통 자연암벽으로 향하는 길은 등산로와 함께 이어지다가 숨은 샛길로 빠지곤 합니다. 샛길로 빠지는 표식이 종종 있기 마련인데 조그만 돌탑 등이 그 예입니다. 이번 산에서는 바닥에서 노란색 삼각뿔은 따라 그 경로를 찾았습니다. 이번 오전 일정의 메인 디쉬는 하이킹, 사이드는 자연암벽들의 사전답사입니다. 다음번에 다시 찾아올 때를 대비해 미리 눈에 익혀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주변에 보이는 절벽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등산로를 걸었습니다. 산을 오를수록 비바람이 거세어졌습니다. 얼마나 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안개인지 구름인지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것이 조금은 몽환적이었습니다. 클라이머들에게뿐만 아니라 일반 등산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트레일이라는 얘기를 오고 가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듣게 되었습니다. 호주사람들 뿐 아니라 외국인도 있었습니다. 현재 굉장히 더운 미국의 어느 주에서 온 아저씨는 수년 전에도 이곳을 들렀지만 잊지 못해 다시 찾았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아들과 함께여서 더욱 특별하다고 합니다. 저와의 대화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특별한 기억 속을 직접 한발 내딛고 들여다보는 것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이끼가 여기저기 심심치 않게 보입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좁고 험한 길로 가야 합니다. 때로는 이끼로 덮인 미끄러운 바위를 밟지 않고는 지나기 어려운 순간들도 맞이합니다. 조심히 그리고 살살 발을 옮기면서 눈에 풍경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했었는데 그 제한시간이 슬슬 다가옵니다. 결국 우리는 정상은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 근처 큰 동굴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하산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저기 깃털과 분비물로 보아, 아마 이 동굴은 어떤 조류들의 집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는 객에게 방을 내어주려는 건지 한 구석을 깨끗이 하고 자리를 비웠습니다. 역시 산속에서 등산이나 클라이밍하면서 마시는 커피맛은 어느 훌륭한 바리스타의 커피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여기에 가볍게 사과나 배, 혹은 가볍게 견과류로 만든 스낵을 먹으면 다시 내려갈 때까지 든든합니다.


하산길은 등산길보다 쉬웠습니다. 다행히 길들이 눈에 익었고, 이정표들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길 내내 우리는 다음에 오면 어디를 제일 먼저 갈지, 그리고 다음은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등 기약 없는 다음여정 이야기에 바빴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즈음에 우리는 대개 두 가지 인상을 받기 마련입니다. 첫 번째는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워서 뭔가 아쉬움이 남는 경우입니다. 여행지를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아쉬움이 배가 되는 듯합니다. 들르지 못한 장소, 하지 못한 활동들, 먹지 못한 음식이 발목을 잡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언젠가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을 알기에 설레기도 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려봅니다. 이번에는 정상까지 오르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이번에 오르지 못한 정상에 발을 디디는 미래의 장면을 그려봅니다. 마치 다음 주에 곧 올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다음 여행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시드니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그 주(New South Wales)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블루마운틴(Blue Mountain)이라는 큰 산맥이 있습니다. 이 산의 맥을 따라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그 끄트머리에 알렉산드라(Mt. Alexandra)라는 산이 있습니다. 시드니에서 남쪽으로 차로 1시간 거리 정도 떨어진 Mittagong이라는 지역으로 출장을 갔었을 때 이 산을 오를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일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은 뒤에는 이미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호주의 겨울 낮은 가끔 속이 상할 정도로 짧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바, 헤드램프를 준비해 왔습니다. 다음 날을 대비해 일찍 돌아와 자려면 시간이 없습니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산으로 향했습니다. 어두운 밤 헤드램프의 불만 의지한 채 산속을 혼자 오르려니, 겁이 안 났다면 거짓말입니다. Mt. Alexandra에서 사람들이 클라이밍하는 자연암벽을 둘러보고 등산로들을 따라가다 멀리 가지 못하고 이내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준비를 위해 일찍 돌아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솔직히 겁이 조금 났습니다.


비슷한 업무로 다시 출장을 가야 하는 일정이 잡혀있는데, 다음번에 가면 좀 더 잘 준비(마음가짐도)를 해서 좀 더 위에까지 올라보고 싶습니다. 일이 고되고 피곤하지만 출장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벌써 머릿속에는 발길을 돌린 그곳에서 앞으로 발을 딛고 있습니다. 과거에 오르지 못한 길을 마저 올라가 보고 싶은 것은 모든 등산객이 가진 욕구일 겁니다. 지난번 끝까지 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패라 하기보다는 그만큼의 성공을 보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좀 더 준비하고 노력해서 그보다 조금 더 나아진다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혹은 지난번보다 못하면 어떻습니까. 저는 귀신이 무섭습니다. 다음번에도 무서운 귀신을 피해 조금 일찍 내려와도 저는 하나도 창피하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도 괜찮을 이유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일곱 번째 에피소드 끝)




<숨 빗소리_ 9월 신작원고_인겐의 여행 산문> _ 여행 산문은 4-5주 주기로 업데이트됩니다.


인겐 - 남반구 하늘 아래 인생 개척 엔지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