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작은 서점에서

VOL.9 / 2023. 10월호. 쉽게 씌어진 시_9

by 숨 빗소리

그토록 작은 서점에서



낭독회가 열리는 서점 안에는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각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천천히, 지는 시월의 저녁빛을 바라보며 모여든 사람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열흘 전 신청했던 작가의 낭독회였다. 반드시 그 작가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단지 마음을 전환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작은 서점 유리창에 붙은 낭독회 안내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 것뿐. 그즈음 일이 잘 안 풀려 좌절의 나날을 겪고 있던 그였다.


작가는 인쇄해 온 종이 뭉치를 천천히 넘기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낭독할 시와 짧은 소설은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라고. 한 편의 시와 그 배경이 된 이야기를 짧은 소설로 엮어낸 것이라고. 그렇게 연결해서 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낭독을 마치면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돌아가면서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을 이야기해 달라고. 기왕이면 오늘 하루에 제목을 붙이고 그 이유를 듣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렇게 먼저 낭독회 진행에 관한 짧은 안내를 마친 후 작가는 바로 이름 없는 한 사람을 위한 시 한 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름 없는 죽음



장례식장 다녀온 다음날

온종일 비가 내려

밤까지 비가 내려


작은 방 속

어둠에 갇혔다


떠나는 것은 무엇일까

친구도 없고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었다

벽면 한쪽을 채우는

많지 않은 책들뿐


고요한 빗 속에 갇혀

밤의 페이지를 하나 하나

넘겨보는 것뿐


천천히 꺼낸 책 한 권

책장 속, 텅 빈 한 자리


너를 읽는 것이리라

네 인생이 담긴 밤의 슬픈 페이지를


너는 그렇게 멀리서

젖어가며


외로운 신의 유일한

사랑하는 문장이

되리라 믿으면서





"그들에게 이름을 주기 위해, 그들의 삶에 이름을 짓다가,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노래 제목을 알아맞히려고 할 땐 그 가사와 내용에 집중하잖아요. 이름 없는 사연들에 적당한 제목을 지으려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에 묵묵히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어요.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열린 마음이 되어서 그렇게요. 그래서 그 열심히 실패한 이야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나둘 이름을 달아주었어요. 한 편의 시가 되기도 했고, 길고 짧은 소설이 되기도 했던, 작지만 소중했던 이름들을요."

작가는 한 편의 시와 짧은 소설 낭독을 마친 후, 그렇게 시와 소설을 함께 묶어 짓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이 없다가 이름을 갖게 된 그 이야기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더 많이 낭독회를 갖게 되었다고 했다. 새롭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가족들이 둘러앉아 불러보듯, 서로를 잘 몰랐다가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조금은 더 가까워진 독자들과 이제 막 태어난 이야기의 제목을,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었다고. 김춘수 시인의 '꽃'의 한 구절처럼 우리는 누군가가 불러줄 때 의미가 되고 진정으로 태어나는 것 아니겠냐고도 덧붙였다.

그리고는 이제 부탁한 대로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오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좋다고. 잠시 오늘 겪은 하루에게 제목을, 아니 제목보다는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이름'을 마음속으로 지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자신의 하루를, 하루의 이름을 불러보고 왜 그렇게 이름을 지었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곤란하다면 하루의 이름만 이야기해도 좋다고. 대신 짧게라도 괜찮으니 여기 모인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달라고 작가는 부탁했다.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이 잦아든 이 무렵에도 여전히 마스크를 쓴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는 자신의 하루에 '파김치'라는 이름을 지어 좌중을 웃게 만들었다. 작가의 요청대로 사람들은 "파김치 씨,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라고 동시에 말했다. 수줍어하던 여자는 마스크 탓인지 또렷하지 않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하루 이야기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서너 문장을 말했을까.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던 여자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온전한 사연을 듣기 전이기에 아무도 여자가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낭독회를 많이 겪은 작가의 표정은 변함없이 침착해 보였다. 작가는 왜 우는지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한 채 울기만 했다. 작가는 끝까지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해줄 수 없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미 당신의 하루는 소중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여자에게 말해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거쳐 마지막으로 그의 차례가 되었다. 벌써 많은 하루들의 이름이 태어난 뒤였지만, 그때까지도 오늘의 이름을 생각하지 못한 그였다. 굳이 멋지거나 아름답거나 재밌거나 거창한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냥 '실패'라고 이름을 지었다. 작가와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서, 진짜 모든 게 실패한 하루 같기에 단순하게 이름을 지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야기하다가 중간에 다른 좋은 게 생각나면 그걸로 이름을 바꾸겠다고도 말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그에게 시선을 모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수록, 그리고 그가 조금 더 자세히 자신의 힘겨웠던 하루를 설명하면 할수록, 그는 왠지 이 하루가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낭독회에 오기 전 마음과 지금 마음은 완전히 달라진 셈이었다. 마침내 이제 막 생각난, 오늘 하루의 새로운 이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됐을 때, 오늘 하루 동안의 실패는 왠지 점점 더 실패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하루의 최종 제목은 '그토록 작은 서점에서'로 완성되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집중해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인양 곧장 몰입을 했을지도. 실패와 성공이 중요하지 않은 자리였다. 단지 열 명 남짓한 사람들, 그들을 닮은 이야기의 선명한 이름들이 새롭게 태어나 서로를 불러주고 들어주는 자리였을 뿐.


그 후로부터 그는 마치 그 낭독회의 작가처럼 무언가를 조금씩 쓰게 됐다. 짧은 이야기와 단 한 편의 시를. 열심히 실패하고 실패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쉽지는 않지만, 쉽게 씌어진 시들을. 그렇게 쓰인 글들을 위해 그는 이름을 지었고, 고요한 새벽이나 늦은 밤 천천히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허민- 시 쓰는 사람.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