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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Aug 18. 2024

어린 아재

VOL.19 / 2024. 8월호. 이창호 연재소설_8화

어린 아재

- 이창호



<제8화>


 파리의 저녁


 태양은 화를 삭였다. 대화도 하기 싫었다.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저 이태양인데요. 김차연 씨 찾았고요. 네 납치범도요. 처벌은 원하지 않아요."

 대사관 직원은 ‘왜 처벌하지 않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태양은 호텔로 돌아와, 갖고 있던 차연의 짐을 모두 챙겨주며 말했다.

 "알아서 한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연락하지 마. 어차피 난 기억도 없어서, 이제부터 당신은 내게 모르는 사람이야."

 차연은 조용히 호텔을 떠났고, 함께 온 밴에게 태양이 말했다.

 "밴, 고마워요. 조금 자고 싶네요. 저녁에 만날 수 있을까요?"

 "알겠어요. 연락하세요."

 잠에서 깬 태양은 눈을 감고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새내기인 자신이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을 왔다. 이걸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에서, 신부를 쫓아온 다른 남자.

 태양은 오른쪽 눈만 떠봤다. 암막 커튼 덕분에 빛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7시께였다. 혼잣말을 했다.

 "이 또한 지나간다. 오늘을 사는 내가 모여, 미래를 바꾼다."

 어둠 속에서 태양은 휴대폰을 찾았다. 밴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밴은 알림 소리가 들리자마자 휴대전화를 열어봤다. 언제쯤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밴, 신나게 와인을 마시고 싶어요."

 메시지를 보자마자 밴의 머릿속에 그곳이 떠올랐다. 밴은 태양에게 답장을 보냈다.

 "좋아요. 내가 호텔 앞으로 데리러 갈게요. 30분 뒤 만나요. OK?"

 밴은 일찍 호텔 로비에 도착해 기다렸다. 머리카락이 덜 마른 채 나온 태양이 매력 있어 보였다.

 "자!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태양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밴은 평소보다 밝게 태양을 대했다.

 "파리에서 하나뿐인 와인을 파는 집으로 안내할게요!"

 태양과 밴은 오래된 와인집으로 들어갔다. 허름했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다. 이곳은 파리에서 베트남 와인 ‘방 달랏’을 파는 유일한 가게였다. 밴은 태양에게 방 달랏을 추천했다.

 방 달랏은 ‘달랏’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드는 가장 유명한 베트남 와인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와인을 즐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이 가진 아픈 유산이다.

 둘은 방 달랏을 마셨다.

 "태양 씨, 방 달랏은 탄닌이 적고 달아서 와인을 처음 마시는 사람들이 마시기 좋아요."

 "탄닌이 뭐예요?"

 "아, 그 탄닌이 뭐냐면... 맛이 없는 감 먹는 맛이 뭐였더라?"

 "아 떫은맛을 말하는 거구나!"

 "아! 맞아요, 떫은 맛."

 둘은 눈을 마주치며 크게 웃었다.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와인은 순식간에 동이 났고, 술자리는 와인을 두 병 비운 뒤 끝났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서 태양이 밴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한국으로 돌아가요. 사실 겁이 나요. 결혼식을 치렀으니 사람들은 내가 결혼한 걸로 알 텐데, 그리고 난 아직 대학생이에요. 사람들은 이것도 믿지 않죠."

 태양의 눈은 그렁그렁했다. 밴은 태양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다.

 "태양 씨, 신부랑 헤어진 건 금방 알려지고 편안해질 거예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혼혈이어서 한국도, 베트남도, 프랑스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모두 내 나라다, 난 어디에도 속한다’고 생각하니 살아가는데 용기가 나더라고요. 태양 씨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해 봐요.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 거예요."

 "밴, 정말 고마워요. 밴의 말 덕분에 내 삶의 이유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어요. 언젠가 우리 또 만나요."

 태양은 호텔로 들어갔다. 밴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태양은 짐을 챙기고 호텔 수속을 마쳤다. 택시를 부른 뒤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와우!"

 어깨를 짚은 밴의 행동과 큰 목소리에 태양은 화들짝 놀라 쓰러졌다. 밴은 쓰러진 태양의 눈을 뒤집어 까고 뺨을 살짝 때렸다.

 "태양 씨, 일어나요. 눈 좀 떠봐요!"

 태양은 밴이 어깨를 흔들어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밴은 휴대폰을 꺼냈다. 15번(프랑스 응급의료서비스)을 누르려는 순간, 태양이 밴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으며 크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나한테 장난친 거 갚아준 거예요."

 너무 놀라 밴은 풀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정말 왜 그래요?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태양은 밴이 귀여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이라는 현실을 잊고 싶었다.

 "밴, 미안해요. 호텔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저 오늘 돌아가는 거 알잖아요."

 "아 가기 전에 얼굴 한 번 더 보려고요. 잘 가라고 인사도 하고 싶었어요."

 대화 도중 택시가 도착했다. 밴이 먼저 봤다.

 "아 택시가 왔어요."

 "아 이제 정말 가야겠네요. 정말 즐거웠어요.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우리 오랫동안 같이 있어요."

 "정말요? 알겠어요. 조심히 가세요."

 "아참, 밴. 반미를 영어로 뭐라고 할까요?"

 "반미요? 반미를 영어로... 반미 샌드위치?"

 "아메리카(America) 노(No). 그럼 씨유 레이러."

 밴은 태양이 탄 택시를 바라보며, 무슨 말인지 되새겼다. 한 참 뒤에야 웃음을 터트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태양은 본가에 짐을 풀었다. 태양의 엄마는 당황스러웠다.

 "태양아,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더하고 빼고 없이 다 얘기한 거야, 쉬고 싶어요."

 태양은 남은 신혼여행 기간 집과 도서관을 오갔다. 동걸과 민훈에게 연락이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말 쉬고 싶었다. 결혼휴가 끝나기 하루 전. 동걸과 민훈이 집 앞으로 찾아왔다.

 "형 내일 당장, 오전 오후에 한 건씩 재판이 있어요. 재판 준비는 우리가 해둘 테니까 아침 일찍 회사로 나와요. 부탁할게요, 우리도 우리지만 의뢰인이 딱한 사람이라 재판 꼭 이겨야 돼요."

 "알겠어, 의뢰인이 있으니 가긴 가야겠지. 사무실 주소 문자로 보내줘."

 "그럼 내일 봐요."

 다음날. 사무실에 온 태양을 보고 동걸과 민훈은 웃음을 터트렸다.

 "형, 만날 정장만 입고 다니더니 오늘 옷이 그게 뭐예요?"

 "왜? 더운데 무슨 정장을 입어."

 태양은 초록색 반바지와 보라색 카라티를 입고 나왔다.

 "뭐 옷이 중요하진 않지만, 판사가 형이 하는 말 믿겠어요?"

 "왜 옷으로 판단하냐? 그게 이상한 법관이지."

 "알겠어요. 일단 오늘 법정에서 해야 할 일이에요, 그리고 의뢰인에게 이 서류 전달해 주시고요. 어차피 민훈이가 같이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알았어, 얼른 끝내고 술이나 한 잔 하자. 할 말이 많아."

 "네, 제가 미리 맛있는 집 찾아둘게요."

 민훈은 갈아입으려고 갖다 놓은 정장을 조용히 태양에게 건넸다. 태양은 일정을 모두 마치고 민훈과 동걸이 알려준 삼겹살집에 도착했다. 식당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SG워너비가 부른 ‘고백합니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화에 계속>

<숨 빗소리_ 이창호 소설>


이창호 - 현직 기자. 책 <그래도 가보겠습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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