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km 파리 뚜벅이 대장정
여행이 당신에게 새로움을 줄 수 있을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면 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여행의 법칙. 몇 년이나 함께해도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우 며칠 같이 있었을 뿐인데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듯, 여행도 그러하다. 아주 짧은 여행이지만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기도, 아주 긴 여행이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강렬한 한 순간뿐인 경우도 있다. 내게 있어 파리는 그 전자와 같았다. 일주일이었지만 2년이 지난 지금 내가 돌아보는 파리는 기억 속에 생생하기만 하다. 2014년 9월 말의 시원한 공기와 따뜻한 햇살, 파리에 도착한 첫날 아침 숙소를 나와 S와 함께 걷던 파리의 이름 없는 그 길이 그립다.
@ Rue Monmarte & Rue du Louvre
길 이름 하나만 믿고 정처 없이 걷기, 일단 걷기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S와 나의 행선지는 솔직히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집주인이 준 지도 한 장과, 구글맵이 있었으니 우리는 일단 걷기 시작했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 좋잖아? 지도를 쓱 한번 보고 우리가 정한 행선지는 루브르 박물관. 숙소에서 가깝지는 않았지만 파리에 왔으니 박물관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가지 않더라도 일단 뮤지엄 패스를 미리 사둬야 날짜를 정해 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우리는 무조건 걸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향해. 햇살 좋은 파리의 오전, 사람들은 하나둘씩 길가에 있는 카페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길쭉길쭉한 그들의 길이에 감탄하며, 오똑하고 날이 선 그들의 코와, 감각 있게 차려입은 그들의 옷차림을 구경하며 "와 파리지엥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며 그저 걸었다.
@Jardin Nelson Mandela & Playground
도보 20분, 우리 앞에 처음으로 풍겼던 관광지 스멜
성당을 끼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사람들의 틈에 섞여 걸어가니 탁 트인 푸른 강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커다란 루브르 박물관의 끄트머리가 보여왔다. 다리 위에는 자물쇠가 주렁주렁 달려있었고, 손수 그린 파리의 엽서를 파는 사람들과 우리처럼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느긋하게 강변에 앉아 토요일을 맞이하는 사람들, 드문드문 보이는 조깅하는 사람들. 파란 하늘과 더 파란 강물! 현실에서, 내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광경은 파리가 나에게 보내는 '낭만'으로의 초대장과도 같았다. '파리'를 인격화 시킨다면, 슈스케의 이승철 톤으로 마치 드루와 드루와~ 파리는 처음이지? 넌 나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꺼야 라는 도발적인 초대장 같달까.
@ Pont des Arts, Institut de France, Pont Neuf & Seine River
여행기의 좋은 점, 나는 저 위의 다리가 퐁뇌프 다리이고, 이 푸른 강이 세인강이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여행의 매력은 내가 상상했던 풍경을 실제로 두 눈에 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벅찬 감동일 수 도 있지만,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당신에게 조용히 다가와 훅! 하고 어퍼컷을 날릴 때 느끼는 한 방이기도 하다. 그저 박물관으로만 생각했던 투명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가 날 들뜨게 했듯, 이름 조차 모르는 파리의 오래된 다리가 날 설레게 만들었듯, 몇 번 머릿속으로 상상을 한다 해도, 한 번 가서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는 그 흔한 말의 의미가 가슴에 콕 박혀온다.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든 여행자에게 새로움을 준다.
@ Pyramide du Louvre, Louvre Museum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 루브르의 유리 피라미드
말로만 듣던 루브르의 어마어마한 규모를 두 눈으로 보고, 길게 늘어선 입장 행렬을 보니 오늘 박물관을 가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다음을 기약하며 루브르 앞 끝없이 일직선으로 쭉 뻗어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나뭇잎들이 곱게 가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튈릴리 정원 (Jardin des Tuileries). 프랑스 헨리 2세의 황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궁 앞에 만들어졌던 이 정원은, 1664년 루이 14세의 정원사에 의해 변형되었고, 루이 14세가 튈릴리 정원보다 베르사유 궁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자 놀랍게도 일반 시민들에게 까지 개방되었다고 한다. 쭉 뻗은 흑길과, 정갈하게 줄을 맞추어 늘어서 있는 나무들, 그리고 곳곳에 놓인 조각상들까지 넓게 펼쳐진 이 정원에는 버릴 것이 없었다. 프랑스에 얼마나 볼 것이 많은데 고작 정원 하나를 이렇게 굉장하다고 하냐고 할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고대부터 내려오는 유적이나,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물, 모나리자나 모네의 연꽃그림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정원 일지 몰라도, 토요일 오후의 튈릴리 정원은 마법처럼 나를 한 명의 파리지엥 (Parisienne)으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 Cafe des Marronniers, Tuileries Garden
파리에서의 첫 점심 :크레페와 키슈, 로제 와인과 샴페인, 우리도 파리지엥처럼
정원의 정중앙 부근에는 마치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지쳤을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듯, 어서 오라고 유혹하는 붉은 파라솔이 펼쳐진 카페가 있었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때는 S와 내가 6년 지기라 너무 좋다. 굳이 상의하지 않아도, 서로의 체력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곳에서 우리는 한 타임 쉬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함께 느끼고 있었다. 따뜻한 오후, 햇살 가득한 토요일 브런치. 로제 와인과 샴페인 한 잔에 우리가 취할일은 없겠지만, 공원 곳곳에 놓여있는 벤치에 누워있는 유럽 사람들을 보니 우리도 머지않아 햇살에 취할 것만 같았다. 햇빛은 쨍쨍, 비타민D! 노 구루병! 우리 둘이 꼬부랑 할머니가 되더라도 허리가 휠 일은 없겠구나!
@ Bassin Octogonal, Tuileries Garden
튈릴리 정원에서 바라본 콩코드 광장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도시는 여행자에게 근거 없는 설렘을 선사한다. 끝없이 이어진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딱히 우리의 여행에 특별한 목적이나 이것만큼은 꼭 이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며, 얼마나 성공적인 여행인가의 척도는 다른 누군가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닌 여행자 자신의 만족이다. 꼭 여기는 가야 해, 이 곳은 필수 코스라고 했어하며 조급해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고 남들이 다 가는 곳 가지 않아도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일단 발길이 닫는 대로 걸어보자, 걷다 보면 길은 나온다. 파리에서는 당신이 방문해야 하는 관광지가 마치 운명처럼 당신 앞에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 Av. Des Champs-Elysee (insta: lovesparis)
어느 순간 우리는 지도를 보지 않게 되었고, 그저 우리 앞에 놓인 올곧은길을 믿고 걸었다.
인생도 이것만 같았으면, 올곧은길 하나만 보고 무조건 직진! 너무 투박한가?
이 콩코드 광장에서 샹젤리제로 이어지는 길의 끝에는 개선문이 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멀리서 개선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여왔다.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목적지도 저 곳일까 하는 생각. 그렇게 다들 쭉 뻗은 도로 위를 걷다가 처음 만나는 갈림길, 샹젤리제와 몽테뉴 거리(Avenue Montaigne)가 만나는 방사형 갈림길이다. 무려 다섯 갈래로 갈라지는 길.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삼삼오오 갈라진다. 모두가 개선문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아니었나 보다, 같은 길을 걷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 모습이 뭔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사회 초년생들의 모습 같았다. 우리의 목적은 같은 줄만 알았던 때가 있었는데, 1년, 2년 시간이 지나 우리는 흩어져 전혀 다른 길들을 가고 있다.
오후 시간은 본격적인 쇼핑 시간이었다. 몽테뉴 거리는 명품샵들이 즐비한 우리나라의 청담동을 연상시키는 거리다. 북적이는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점원 언니들을 차지하느라 끝없는 눈치싸움을 해야 했고, 인터넷에서 봐 두었던 품목의 재고가 있는지 알아봐야 했고, 샵에서의 현지 가격을 물어두었다. 백화점 샵과 가격을 비교하기 위함이다. 몽테뉴에서 샹젤리제를 따라 개선문으로 이어지는 거리 양쪽에는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옷가게와 화장품 가게들이 주욱 늘어서있다. 그냥 발길 닫는 대로 들어가 구경하면 된다. 한 거리에 모아놓으니 참 편하고 좋다. 챔스 엘리제라고 촌스럽게 읽다가, 설마 이 거리가 그 노래에 나오는 오 샹젤리제야?라고 묻는 나의 표정에 어처구니 없어 했던 S의 표정이 아직 기억난다. 나 은근 무식해 친구야, 해외에서 일한다고, 영어 좀 할 줄 안다고 다 알 거라는 착각은 마, 유럽여행 처음이라니까!
@ Le Relais de l'Entrecote, 15 Rue Marbeuf
French Steakhouse Restaurant
정처 없이 걷다 보면, 꼭 방문해야 할 관광지가 나타난다는 사실? 음, 당신이 개코라면 찾아낼 수 있는 유명한 저렴이 스테이크 하우스, 샹젤리제의 뒷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샹젤리제의 샵들을 3시간가량 누비고, 앞에 보이던 초콜릿 샵의 달달한 냄새에 취해 충동적으로 구매한 초콜릿은 La Maison du chocolat의 수제 초콜릿이 었고,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맛집을 찾다 근처라는 것을 알게 된 스테이크 집은 Le Relais de l'Entrecote 였으니 우리의 운과 타이밍은 정말 끝내 준다고 표현하겠다. 그것도 오픈 하자마자 들어가 바로 착석하는 영광까지. 우리가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쯤 가게 앞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고서는 일찍 온 것이 신의 한 수였다며,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며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향해 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하루가 벌써 저물어 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는 시간이 너무 안 가서 짜증이 났었는데, 휴가 오니까 누가 나의 시계를 계속 빨리 돌려놓는 느낌이었다. 시간이라는 게 참 야속하고, 치사하다.
@ Tower Eiffel, Pont de l'Alma
10km, 현실에서 낭만까지의 거리
8시간, 무작정 숙소를 나와 황금빛 에펠탑을 만나기까지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만이라면, 설레는 마음에, 넘치는 자신감에,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마치 내가 뭐든 할 수 있는 슈퍼맨이 된 것만 같겠지만, 현실은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하루 종일 걸었던 거리는 10km, 오피스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상에 익숙한 내게 현실에서 낭만까지의 거리였다. 발바닥은 고통을 호소했고, 강렬하게 내리쬐던 태양은 어느새 저버려 서늘한 강바람에 닭살이 오소소 돋아왔다. 내 눈앞에 펼쳐진 황금빛 에펠탑을 바라보며 하루 종일 길고 포근한 꿈을 꾼 기분이었다, 쑤셔오는 발바닥만 아니라면. 누군가 내 잠을 깨운다면, 다시 침대에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후속 편을 다시 꿈으로 꾸고 싶은,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고 소망하는 그런 한 가을밤의 꿈. 내일도, 모래도 이어질 것만 같은 그런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