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일상이 문득 여행이 되는 순간

여행에 기대어 지내던 지난 시간들

by hler moong


‘여행’이란 두글자는 늘 나에겐 가장 설레는 단어이다. 이렇게 따뜻한 봄햇살이 내리쬐는 날이면 언제나 그렇듯 여행이나 떠나볼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혼자 떠났던 첫번째 여행지는 남미였다.

캐나다에서 잠시 머물던 시절, 어느날 지인과 함께 도서관에 갔는데 그때 그분이 나에게 론리플래닛에 실린 볼리비아의 우유니사막과 페루의 마추픽추 사진을 보여줬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구나!’ 하면서 우유니사막 사진에 그대로 꽂혀버렸다. ‘여기는 무조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볼리비아 우유니사막 / 페루 마추픽추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남미라는 낯선 대륙을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게 되었다. 당시엔 인터넷이 안되던 때라 손에 쥔 여행책 한 권에만 의지해 다녔는데,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길치에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였던 나는 꽤 많이 고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첫번째 여행은 내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도전’이라는 걸 해보았고 온통 낯선 것 투성이인 곳에서 꽤 많은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페루 / 볼리비아 / 칠레 여행


그 이후부터 나는 ‘여행’이라는 것에 빠져 살았다. 일상이 답답할 때면 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다. 해마다 달력만 바라보며 휴일이 있으면 고민없이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떠나려 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때 주변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여행하면 답이 나와?
여행하고 답은 찾았어?


하지만 나는 애초에 내 인생의 어떤 ‘정답’을 찾기 위해 떠난 건 아니었다.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다른 문화를 경험하며 앞으로의 내 삶의 방식에 있어 더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지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갈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 쉽게 주저앉지 않을 단단한 마음을 얻는 것이 내가 생각한 ‘나의 여행의 결실’이었다. 혼자 떠났던 첫 남미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또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의 연속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진짜 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끌어내보고도 싶었다. 정말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무엇에 마음이 움직이는지, 어떤 일을 할 때 조금 더 나답게 즐길 수 있는지, 그런 질문들을 깊게 그리고 길게 탐색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기간도 정하지 않은채 그저 일단 떠나버렸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봐도 그 선택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였다.



예전에 ‘넌 여행이 왜 좋아?’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늘 이렇게 답했다.

-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그 순간에는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런 잡생각이 들지 않아서 라고.


풀리지 않는 숙제를 안고 발버둥치는 일상과는 달리, 여행지에서는 내 모든 감각기관이 자연의 소리에만 향하게 되니까.

여행을 하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저 그곳에서 즐기는 여유만으로도 행복을 느낀 적이 아마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의 치열한 일상이 닿지 않는 다른 공간으로 잠시 떠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순간들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 또한 우리가 지나온 일상이 있었기에, 그 순간이 더 값지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에게도 여행은 나와 맞지 않던 일상을 버텨내기 위한 하나의 통로였던 것 같다. 소위 ‘탈출구’라는 표현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일상에서의 잠깐의 탈출로만 끝나는 여행은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을 위한 떠나기임과 동시에 그 일상을 변화시키는 계기로서의 떠나기이기도 했다.



지금 내가 배우자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이 공간으로 여행 오시는 많은 분들도 어쩌면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오던 일상을 잠시 뒤로하고 새로운 공간에 와서 자연을 벗삼아 아무 생각없이 쉬고 그저 뒹굴거리며 보내는 하룻밤을 꿈꾸며 오시는게 아닐까. 그게 예전의 나처럼 다시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되겠지.


그래서인지 치열한 일상을 지나 이곳을 찾아오신 분들을 보면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그 시절의 내가 이곳을 방문했다면 여기에서 어떤 걸 느끼고 돌아가고 싶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또 과거의 내 경험을 떠올려 본다. 어떤 공간이 나에게 힘이 되었는지, 왜 그곳에선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과거의 나와 같은 분이 오신다면 이곳이 그분에게도 잔잔한 힘을 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언젠가 방명록에 이런 글이 남겨져 있었다.


사연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받아낼 공간,
그런 넓고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세요.


그래서 이곳에 오신 분들께 가장 드리고 싶은건 ‘낭만’과 ‘따뜻함’ 그리고 ‘위로’이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이곳에 오셨다면, 소위 일상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이곳만의 낭만을 전해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 낭만 속에는 따뜻함이 담겨있어, 자연스럽게 위로로 전해졌으면 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냥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유없이 마음이 평온해지고 따뜻해지는 그런 곳 말이다.


모로코 하실바라드에서의 일상


예전에 모로코의 ‘하실바라드’라는 곳에 꽤 오래 머무른 적이 있다. 이곳은 사하라사막을 가기 위해 머무르는 곳인데,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땐 한달넘게 머무르는 분들을 보면서 ‘여기서 도대체 뭐하러 저렇게나 오래 있는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이틀 지내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렇다 할 특별한 볼거리와 할거리가 있는 동네는 아니었지만, 따스한 햇살 아래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그 아래 쉬고 있는 낙타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면, 시끄러웠던 내 마음이 어느새 잔잔해져 있었다. 이곳도 왠지 모르게 그곳과 참 많이 닮아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런 공간이 되기 위해 요즘도 매일같이 이 공간을 조금씩 천천히 가꾸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라 서툰점도 많고 어설픈 구석도 많지만 그래도 그 과정이, 이 일상이, 마치 여행처럼 참 설레고 즐겁다.



사실 나는 이렇게 여행을 참 즐겨했지만 여행을 내 직업으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소위 여행업에 종사한다거나 그런 거 말이다. 여행을 업으로 삼게 되면 나중엔 ‘여행’이라는 두글자에도 설레지 않게 될까봐.

그런데 참 신기하다. 이렇게 돌고돌아 지금의 난 결국 여행과 닿아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말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이라면 한 번쯤은 해보는 생각, "일상 여행"

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한다.

- 일상을 여행처럼 살 수는 없을까?


예전에는 그게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지금은 일상을 이루는 작은 요소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고 설레서 가끔은 여행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쩌면 나는 이렇게 평생 여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약 지금 내 마음이 답답함 속에 갇혀 있다면, 언제든 그냥 여행을 떠나보길 바란다.

새로운 경험을 위한 시간이 되어도 좋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어도 충분히 괜찮다. 낯선 곳이 건네는 잔잔한 위로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기 위한 용기와 동기부여가 되어 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렇게 여행 속에서 얻은 단단한 마음들이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상이 문득 여행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올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