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my moong Mar 21. 2021

‘절친’ 란에 적힌 이름이 변해간다

친구도 영원하진 않아




‘친구’란 무엇일까?


친할 친(親)

   옛 구(舊)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을 우리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둔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곁에 있는 친한 친구, 소위 '절친'이라 불리는 친구는 계속해서 바뀌어 가는 듯하다. 


친구도 영원하진 않아.


한 해 한 해 지나갈수록 다른 어떤 말보다 아버지가 해주셨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소위 ‘성인’이라는 부류에 속하고 나면 우리에게 ‘친구’라는 개념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는 그저 동갑내기만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친구’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데에 나이 따위는 상관없어지기도 하고 그저 오래 알고 지냈다고 친한 친구는 아니게 돼버린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에서야 '친구'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며 그 ‘친구관’이라는 것이 점점 바뀌어 감을 느낀다.


왜 이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회’라는 이 공간 속에 빠져들수록

왜 내 곁의 친한 친구는 변해가는 걸까.


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의 '절친'의 대열에 들어섰던, 현재 남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몇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


어렸을 때는 그저 내 옆에 있고 같이 재밌게 노는 친구가 절친이었다면,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나와 성격이 잘 맞는 것은 물론 관심사가 비슷한 친구, 나아가 가치관이 비슷한 친구와 더 친한 사이가 된다. 


우리는 10대 시절 친했던 친구의 과거 몰랐던 여러 모습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그 경험을 통해 그 친구와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회의 때가 덜 묻어있던 초중고 시절의 우리는 각자의 관심사, 가치관 등을 공유하며 친해지기보다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재밌게 놀다 보면 어느새 친해져 있었으니깐.


그렇게 친구가 된 그 시절의 우리는 서로의 관심사가 어떠하든, 서로의 사고가 어떠하든,  서로의 성격이 어떠하든,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의 앞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 그저 착하고 같이 놀았을 때 재밌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또 10대에는 한번 같은 반이 되면 최소 1년은 무조건 같이 있어야 했기에 어떠한 부분이 우리와 잘 맞지 않더라도 1년이라는 긴 시간이 그 부분을 어느 정도 감싸주었다. 그래서 성격차이, 사고 차이, 가치관 차이 등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10대, 20대 초반까지는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아오기 때문에 대화 주제가 비슷해서 그걸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나와 비슷한 사고와 가치관을 가진 친구를,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를 자연스레 내 옆에 더 가까이 두게 된다. 혹은 비록 가치관은 다를지라도 각자의 가치관을 서로 존중해줄 수는 있는 그런 친구를 말이다.


둘. 나와 현재의 상황이 비슷한 친구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우리 각자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취업을 하여 직장을 다니기도 하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사는 예전의 절친들과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이 달라지자 공감대가 사라지고 공감대가 사라지자 우리 사이에는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내 삶의 이야기가 친구에게는 흥미롭지 않고 친구의 삶의 이야기가 나에게는 흥미롭지 않다. 


예전에는 그저 농담 따먹기만 하며 하하호호 웃고 떠들기만 해도 좋았는데

이제는 내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공감할 수 있는 친구를 더 찾게 된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알았다고 해도 만나서 나에겐 재미없는 이야기만 하는 일련의 행위가 이제는 시간낭비로 느껴진다.


그렇게 이제는 나와 상황이 비슷한 친구에게만 자주 연락하게 되고 자주 찾게 된다.


셋.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친구


삶을 살아갈수록 우울하고 부정적인 친구보다는 늘 에너지가 넘치고 긍정적인 친구를 찾게 된다.


예전에는 부정적이고 삶이 고된 친구가 있다면 내가 먼저 연락하고 불러내 그 친구에게 힘이 되어주려 했다면,

지금은 그보단 만났을 때 "내가" 에너지를 받고 "내가"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소위 ‘좋은 사람’만을 내 절친으로 두고 싶어 진다.




앞서 이야기한 절친으로 남게 되는 이들의 모습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현재의 나에게 "필요"한 친구
현재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


어른이 되어갈수록 인간이라는 이 이기적인 동물은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부터 생각하게 되나 보다.


우리는 사회를 경험할수록 인간관계에서, 특히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내 생활이 바빠서, 내 삶이 여유가 없어서, 소위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래서 내가 덜 힘들고 내 에너지를 덜 소모하고 싶어서, 

그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상대에 대해 더 따지고 드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각자의 힘든 현실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 본연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점점 더 친구라는 존재에 의지하게 되어 친구를 만남에 있어도 예전보단 더 까다로운 잣대를 들고 판단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무료하고 심심해서, 나에게 주어진 무료한 시간을 그저 킬링 하기 위해 찾게 되는 친구가 아닌

나와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를 나의 절친으로 더욱 원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 친구를 통해 나의 고독함과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씻겨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슷한 이유로 소위 좋은 사람, 내가 본받을 만한 괜찮은 사람을 나의 절친으로 둠으로써 그 친구의 좋은 에너지로 인해 내 삶이 조금은 더 생기가 돋기를, 나의 나쁜 습이 그 친구로 인해 조금은 나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닐까.


결국엔 좀 더 나은 나 자신을 위해서, 내 마음의 즐거움과 안정을 위해서.


그렇기에 슬프고도 어쩌면 당연한 이 모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래도 우리의 인생 어디에선가 머물고 있는 절친들과의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절친을 우리의 삶에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그들이 노력할 만한 상대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또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부터 좋은 사람이 되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우정은 중요하니깐.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우정의 가치는 크게 달라지지 않으니깐.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자주 보지 못하더라도, 늘 내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 하고 싶은 게 친구니깐 말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