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n there

영국에서, 아빠 육아

by 프시케

부동산에서 사람이 보내주기로 했다. 세탁기가 말썽이었다.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무뚝뚝하게 생긴 아저씨가 얼굴을 찡그리며 서 있었다. Hi 외에 다른 말도 없었다. 말수 적고 무뚝뚝한 사람을 마주하면 왠지 긴장하게 한다.

그는 세탁기를 살피더니 부품이 부족해서 오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오후에는 아이들을 재워야 하기 때문에 초인종을 누르며 등장하면 아이들 잠을 깨울 것 같아서 고민을 했다.

영국에서는 서비스 수혜자보다는 서비스 제공자의 입장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각종 기사님 방문 시간 약속을 잡으면 일단 약속 시간을 잡는 것부터 쉽지 않다. 약속 시간을 잡더라도, 한 시면 한시, 두시면 두시, 이렇게 딱 떨어지는 시간을 주지 않는다. ‘월요일 오전 중’, 혹은 ‘수요일 1시에서 4시 사이’ 이렇게 긴 범위를 가진 예약 시간을 알려주는데, 중요한 것은 그 시간조차 잘 지켜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 또 그러면서도 따로 연락이 없어 결국 기다리던 내가 직접 연락을 해서 그분의 사정에 맞춰 다시 예약 시간을 잡거나 이미 기다린 김에 더 기다려야 했다.
서비스 시간은 더디게, 그쪽 사정에 맞춰, 이쪽 사정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흘러간다. 한국의 빠릿빠릿하고 정확한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던 입장에서는 고구마 여러 개를 한 번에 막은 듯 갑갑한 느낌을 받게 되는 서비스 문화였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찌 되었든 우리 모두가 서비스 수혜자이기 이전에 서비스 제공자이기도 하기에, 일하는 사람의 입장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는 이런 서비스 방식이 좋아 보이기도 하다. (또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에서의 시간 흐름이 왜 그토록 어지럽도록 빨랐는가도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바쁘게 하며,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격마저도 무뚝뚝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명확한 시간을 알려 달라', 그리고 '아이들이 낮잠 잘 시간이 따로 있으니 그 시간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 달라',를 부탁하는 것은, 못할 것은 아니어도 쉽게 할 수 있는 부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낮잠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든 사수해야 했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아저씨가 가져온 부품을 주섬주섬 챙겨서 성큼성큼 현관 문쪽으로 가고 있었다. 오락가락 급한 마음에, 아저씨 뒤통수에 대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 언제쯤 오실 수 있는지 확실히 알려주실래요? 그리고 1시부터 3시는 되도록 피했으면 좋겠는데요, 왜냐하면 그때 가요, 아이들 낮잠 잘 시간인데요, 그래서 안 오시면 더 좋은데요, 혹시 그때 오셔야 할 수밖에 없다면 초인종 누르지 말...”

이 긴 문장을 속사포 랩처럼 중얼거리듯 하는데 아저씨가 현관문을 턱 잡더니 확 뒤돌아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딱 한마디 하시고는 씩 웃으셨다.

“Been there, No worry. "
(저도 아기들 재워봐서) 알아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는 오기 십분 전에 아이들 자고 있는지 확인 문자를 주셨고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조용히 오셔서 또 조용히 고치고 역시 꼭 해야 할 말만 짧게 전달하고 가셨다. 말수가 적고 찡그린 얼굴이었는데 'Been there(해봐서 안다)'는 짧고 묵직한 그 한마디를 기점으로 그가 달라 보였다. 꼭 필요한 말만 하는 심지 굳은 사람으로까지 여겨졌다. 어쩌면 그는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아기 재우기도 아빠로서 당연히, 기꺼이 해야 하는 일로 묵묵히 매뉴얼을 따르듯 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했다. 그리고 아기 키울 때는 이런 무뚝뚝한 다정함이, 묵묵한 실천이, 말로 하는 공감보다는 몸을 움직여 해결해주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쌩쌩해진 세탁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Been there라는 짧고 강렬하고 그러면서도 다정한 그 말을 생각했다. 그 뜻을 풀고 풀고 풀다 보니 어느 한순간, 어머 세상에!!! 싶었다. 하마터면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빠뜨릴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아이들을 키우며 이 세상 많은 여성들이 엄마이거나, 엄마가 될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엄마가 있거나 하는, 엄마 없이는 어떤 얘기도 시작할 수도 완성할 수도 없는 경험적 공통분모가 있음을 알았고 그 연대감에 마음을 많이 기대 왔었다. 그런데 그러면서 또 다른 중요한 한 부분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 세상의 그 많은 남성들이 아빠이거나 아빠가 될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엄마가 있는 엄마 경험을 가진 공통분모를 가진 사람들임을, 내 남편만 아이들의 아빠인 것이 아니라 길에서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모든 아저씨들도, 아빠이거나 아빠가 될 것이거나 혹은 적어도 엄마 경험이 있는 사람인 것, 결국 그렇게 엄마 육아와 아빠 육아가 함께 돌아가고 있음을 놓치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내내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뒤늦게 비장의 카드를 발견한 듯 새삼 반가웠다. 고구마 같이 갑갑한 서비스에 무뚝뚝하고 말 짧은 아저씨를 만나 얻은, 사이다 같은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