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ytime

나의 영국 언니

by 프시케



언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국에 와서 6개월 만에 집을 옮기고 새로 들어갈 집의 정기검사(인스펙션)를 받는 날. 아직 이 곳 사정도 어둡고, 집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마음을 씁쓸하게 했고, 또 작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보러 가서 꼼꼼히 살필 여유도 없을 것 같아 걱정이 라다는 얘기를 했더니 언니가 따라나섰다. ( 남편은 이번 기회에 한국인이 더 많은 다른 동네로 가자고 했지만 이미 이곳에 와서 정든 언니와 다른 동네 친구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같은 동네로 이사를 감행했다. 그래도 이사는 이사라 몸 쓸일 마음 쓸 일이 많았다. )

그게 작년 이맘쯤(1월 말일)이었는데 그날 날씨가 정말 추웠다. 그런데 검사원(인스펙터)은 한 시간 반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언니와 나, 아이들은 여기저기 연락을 하면서 칼바람을 맞고 있었다. 아이들은 울었고 나도 이런저런 회의감을 느끼고 있어서 아이들을 달래는 것도 언니의 몫이었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인스펙터가 허둥지둥 왔다. 그러더니 집 열쇠만 건네주며 이미 오전 일찍, 이전에 살던 세입자를 대상으로 인스펙션(집 상태 점검)을 했으니 나와는 따로 인스펙션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가서 살펴보고 문제가 있는 것 같으면 다시 이야기하라고 하고는 바로 다시 차에 올라탔다.

나는 허탈했고 당황했지만 이미 지쳐있어서 어쩔 수가 없다고 느꼈다. 밖에 서서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리느라 몸에 감각이 없었고, 집 열쇠라도 받았으니 아이들을 달래서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언니에게도 미안했다. 감기에 걸리면 어쩌나 싶었다.

그런데 언니는 생각이 달랐다. 인스펙션을 이전 세입자들과 했다고 해도, 앞으로 들어올 세입자인 나와도 다시 집을 살펴봐줘야 하는 것이 인스펙터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한다고 했다.

언니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언니의 온화하고 부드러움에 어떤 카리스마가 입혀졌다. 언니는 이미 차에 타고 시동을 걸고 있는 인스펙터에게 웃으면서, 하지만 단호하게, 조곤조곤 따지기 시작했다. 인스펙터 역시 웃으며 이런저런 변명의 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천천히 차에서 나왔다.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언니가 그대로 놔주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그와 함께 집안에 들어왔고 언니는 그를 옆에 세워놓고 집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언니는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인스펙터는 여차하면 도망가려고 엉거주춤 서있으며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역시 삶의 경험치를 가진 언니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는 듯했다.

언니는 여기저기 손상된 부분을 가리키며 그에게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머 그런데 여기는 찍으셨나요? 저기 긁혀 있는데요. 보세요. 아까 찍으셨다는 사진 가져와 보시겠어요?’

인스펙터는 난처하게 웃더니 차에 가서 사진기를 다시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오전에 이미 완벽하게 끝냈다더니, 결국 언니의 손짓에 따라 50장 정도의 사진을 추가로 찍었다. 언니는 이 사진들을 인스펙션 리포트에 꼭 반영하겠다는 확답을 받기 전까지 그를 도망가게 놔주지 않았다.



인스펙터가 사진기를 가지러 간사이, 우리는 주방 한구석에서 서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며 인스펙터의 불성실함과 게으름을 '표정으로' 욕했다. 그리고는 여고생들처럼 웃었다.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기억을 추억으로 바꿔주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없었더라면 춥고 서럽고 갑갑하고 억울하고 짜증 나는 경험이었을지도 모를 이 날의 기억이, 두고두고 함께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어 좋았다. 힘들 때 같이 욕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욕하면서도 킥킥거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날 밤 자려는데 언니가 문자를 보냈다.



“내가 변호사도 아니고 내가 찍은 사진은 효력이 없겠지만 그래도 사진도 찍어서 문서로 저장해놨으니까 나중에 인스펙터가 자료 보내면 나에게도 보내줘 봐, 비교해보게. 그리고 너 이번 집 계약서도 내가 한번 봐야겠어. 시간 될 때 보내봐. 이사하고 정리하느라 힘들겠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


언니가 그냥 무작정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일 뿐 아니라 생각보다 꼼꼼하고 능청스럽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무조건 내 편이라 든든했다.

그날은 그렇게 추운 날씨에 밖에서 덜덜 떨었는데도 걱정했던 것처럼 감기는 나에게도 아이들에게도 언니에게도 찾아오지 않았다. 조금만 추워도 금방 감기에 걸려 골골거리는 나인데 이상했다. 아마도 언니가, 나의 영국 언니가, 면역력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책상이 있음에도 언니의 책상을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