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늘처럼 바람이 불던 금요일 봄밤,
주말을 앞두고 어떤 설렘이,
뭔가가 곧 시작할 것만 같은 갈망이
공기 중에 떠 있는 듯 하던 어떤 날,
하지만 역시 주말의 끝에는
이 모든 것이 다시 일상 속으로 잠기어들어갈 것도
동시에 예감할 수 있는 그런 날,
시간은 느리게 지나갔고
어제가 오늘같고
오늘이 내일로 그대로 미끄러질 것을 아는 것이
아직은 위로가 아니라 지루함의 범주에 귀속되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열두살의 나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
한 공연단이 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공연을 하는데
티켓도 따로 필요없고 그냥 와서 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시골 깡촌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누가 공연을 한다고?"
전무후무한 얘기였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의 표정에는
의구심과 피로가 가득했고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하는 내용과 표정을 해독하며
세상을 감지해가던 나에게도,
이것은 의아한 소식이었을 뿐, 중요한 소식은 아니었다.
모두들 공연을 보러갈 마음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날 오후,
학교가 파하고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 나는,
뜨뜨미지근한 표정으로 감탄사 대신
짧은 물음표만 나누던 어른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또 나 나름의 물음표를 간직한 채
어른들을 따라 학교 운동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어둠이 조금씩 드리워질 시간,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운동장에 모여들었다.
'공연은 무슨 공연이야'를 이야기하며
피우던 담배꽁초를 밟아 끄던 동네 아저씨들도
팔짱을 끼고 열을 지어 서 계셨다.
우리는 정말 모두,
딱히 오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기대를 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갈 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이었다.
그 때까지 '공연'이라고는
아이들끼리 고만고만 부딪치면서 하는
재롱 잔치, 학예회 공연이 전부였고,
나에게 공연이란 선생님의 지시를 따를 것,
그리고 준비물을 빠뜨리지 않을 것,
또 혼자 반대로 돌아서 대오가 흐트러지게 하지 않을 것,
딱 그 정도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기대도 없었지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경험 조차 전무했던 상태.
하지만!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예상을 하셨을 수도 있고
예상을 못하셨을 수도 있으나!)
그날,
그밤,
그 공연을 마주하고
돌아오는 그 길에,
나는 어떤 '황홀'을 알았고
또 '전율'이 무엇인가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 공연이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얼마만한 것인지
그 기억이 얼마나 깊숙이 내 안에 들어왔는지,
지금 쓰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다 표현하지 못할 것만 같다.
그냥, 너무 좋았다.
매일 걷던 학교 운동장이,
그 일상의 공간이,
마법처럼 변신하던
그 날, 그 밤, 그 빛, 그 꿈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공연을 하시던 분들은
그 공연을 어떤 중요한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오시다가,
어떤 이유 때문에든 모든 계획이 무산되어
그 동안 공들여 함께 쌓아온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전하지 못할 위기에 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무대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라도'
딱히 공연을 볼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 앞에서 '라도'
열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는, 그리고 그 때 딱히 갈곳이 없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모든 우연한 관객들은,
그 공연의 세례를 받은 것이었다.
어떤 어긋남 덕분에 얻게 된 기회였지만
그것은 어마어마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전까지 내가 알지도 못했던 어떤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필수의 사치를 알게 되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없었지만
그냥 알았다.
이런 공연은 그냥 성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열과 성을 다 쏟고 피와 땀을 다 흘리고
자신이 가진 사랑을 모으고 모아
가장 적재적소의 장면에 재현하겠다는
의지를 다져온 사람들만이 펼쳐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내 안에도 그렇게 달뜬 열망이 피어났다.
나도 그런 열정을 나누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열정을,
그런 열정을 밤새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내내 기다리게 되었다.
좋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좋은 책을 만날 때마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마다
좋은 그림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찰나의 감정 속에서 영원을,
그리고 우리 영혼의 실루엣을 마주하게 된다.
열두살의 그 날, 그 밤, 그 빛, 그 꿈을
다시 앓게 된다.
누군가는 이런 순간 카메라를 들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런 순간 붓을 들겠지만
나는 연필을 잡게 된다.
이 좋은 느낌을 더 오래 간직하고
글로 재현하고, 복원시키고, 박제시켜,
더 오래 더 많이 나누고 싶어서.
또 그 때 어쩔 수 없이 공연을 했던 그 분들이
딱히 갈데가 따로 없어 그곳에 앉아있던
열두살 아이의 마음에 심어준 것이
무엇인지 알리가 없을 수 있듯,
우리가 하는 모든 사소한 일이
과연 어디에까지 뻗어갈 수 있을지
그것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어떤 시간은 우리 내면에 고스란히 남아
그 시점부터 새로운 시간을 굴러가게 한다.
그것은 또 새로운 이야기가 되고 새로운 사랑이 되고
또 새로운 만남이 되고
다시 봐도, 매일 들어도, 새로운 반짝임이 된다.
찰나의 감정이지만,
또 이 감정은 결국 바람처럼, 연기처럼,
시간의 파도에 휩쓸려 흩어지고 사라지고
결국 형체를 잃어가겠지만,
이 모든 순간들은 사라지나
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매순간 새로운 시간이 열린다.
하여,
유한한 시간을
무한히 쓰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는, 쓴다.
어김없이, 고스란히,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