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가 느리다는 건 거북이가 한 얘기가 아니다
라때는 말이야
# 장면 1
외출을 하려고 나서는데
셋째(4살)와 둘째(6살) 사이에
유모차 쟁탈전이 벌어진다.
이 쟁탈전에서 떨어져 있는 첫째는
무척 여유 있는 표정으로 한 마디 한다.
"아, 나는 네 살 때도
유모차 안 타고 혼자 잘 걸었는데..."
# 장면 2
둘째가 옷을 벗다가 낑낑대며
나에게 도움을 청할 때도
첫째는 옆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
"아, 나는 여섯 살 때 혼자
모든 옷을 다 입고 벗을 수 있었는데..."
# 장면 3
셋째가 화장실에 가면서
반드시 엄마가 동반되어야만 응가가 가능하다고
엄마를 잡아 끌 때도 첫째는 같은 말을 했다.
"아 나는 네 살 때 혼자 화장실 잘 갔는데."
이 일련의 자기 독백이 가진,
선택적 기억과 편리한 망각,
그리고 천진한 비교의식에 기초한 해맑은 자신만만함에
나는 속으로 웃는다.
웃음을 참느라 혼난다.
진실은 이 엄마가 잘 알기 때문이다.
진실은 말이야,,,,,
첫째는 느려도 느려도 정말 느린 아이라서
무엇을 하든 항상 늦게 깨우쳤다.
그리고 사실 여전히 그 속도감을, 쭉 일관적으로
유지하며 성장 중이다.
통잠이라는 것도
5살이 되어서야 가능했고(셋째는 50일)
기저귀도 4살이 되어서야 뗐고
(셋째는 따로 트레이닝 없이 18개월 때 혼자)
기초적인 문해력도
9살이 되어서야 갖추기 시작했고
(둘째는 안 가르쳐줘도 6살 때 자모음을 구분)
리스트는 쓰자면 길지만 이하 생략.
내가 내 속도를 받아들이는 딱 그만큼만
첫째의 자기 독백이 어이없게도 웃기나
또 이렇게 자신을 뿌듯하게 보는 것도
절대적 속도가 느린 첫째에게는 필요한 것,
사실적 관찰을 바탕으로 한 상호 대차표는
굳이 첫째에게 일러주지 않기로 했다.
그저 첫째의 '나는 저맘때 훨씬 잘했는데'의 서사를 마주하며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가,
어느 한순간
어떤 생각에 도달하고는
헉!
멈춰 서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아이들을 보며
이런 비교 판단을 자주 하곤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못하는 게 아니라
아직은 어려운 건데
어려움을 도와주고 이끌어줄 생각을 하기보다
저렇게 떨어져서 말 붙이기만 하던
나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을 여러 번 갱신하는 과정을 지나서야
도달하는 성장과 성숙이 있고
각자의 속도와 각자의 방향이 있는데,
그냥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한번 더 도와주기 위한 판단을 해야 할 것이었는데,
어쩌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건,
사실 내가 첫째보다 더 심할 수도 있다.
내 속도감으로 아이들의 속도감을 판단하며 답답해한 건,
그건 아마도 내가 해낼 수 있는 속도에 비해
내가 해내고 싶은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일 것이란 생각도 했다.
내가 내 속도를 받아들인 딱 그만큼
아이들의 속도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아직의 시간을 통과하는 중일뿐
거북이가 느리다는 건 거북이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빠르고 느리고는 없을 뿐
모두에게 그저 '아직'의 시간만 있을 뿐이다.
오늘은 또 얼마나 한
'아직'의 시간을
통과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