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 you
영국에서, 한국의 저출산 대책을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과 외출을 하며 택시를 탈 때가 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나는 기사님들께 어김없이 같은 반응을 듣곤 했다.
‘애국하시네요.’
그분들께 내가 ‘애국하는 엄마’로만 보인다는 사실이 나는 도리어 신기했다. 과연 이분들이 다둥이 엄마들을 독려하라는 집단적인 지령을 받기라고 한 것일까? 어쩜 그렇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뉘앙스 하나 달라지지 않은 음성으로 같은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 친절과 칭찬의 옷을 입은 무람없는 반응의 일관성과 상투성에 나는 놀라웠다. 아마도 뉴스와 미디어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저출산을 걱정해오고 있기에, 이 분들은 운전을 하시며 라디오 뉴스를 반복적으로 듣기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말을 받지도 흘리지도 않고 그냥 허공에 띄워두었다. 그러면서 나만의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런 ‘나의 선택’을 보자마자 칭찬해주고 싶은 그 마음을 선함과 호의, 친절과 배려로 해석한다. 하지만 칭찬이라도 나의 출산과 육아가 ‘애국’으로 단순하게 묶이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아이를 낳기로 할 때, 인구 절벽에 대한 공포와 낮아지는 출산율에 대한 사회적 걱정은 단 한 점도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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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오고는 딱 한번 아이들을 데리고 택시를 타보았다. 택시로 20분 거리에 있는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았던 날이었다. 큰 마음먹고 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아이들과 놀다가 아이들이 더 지치기 전에( 내 에너지를 조절하기 위해) 자리를 떠야겠다고 느꼈다.
택시가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떼를 쓰는 아이들 때문에 아이들을 한 명씩 택시에 태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미 졸릴 때면 더 심하게 떼를 쓰는 아이들은 서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고, 그나마 가장 말귀를 잘 알아듣는 첫째부터 택시에 옮기며 기사 아저씨에게 조금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나는 조금 스트레스를 받으며 빠르게 말하고 있었는데 아직 타지 않고 떼를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아저씨의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아저씨의 눈빛에는 사랑이 빠진 사람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아빠 미소를 보았다. 아저씨는 나에게 하는 말도 아니고 아이들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계셨다.
Aww bless them.
나는 여전히 몸 바쁘게 아이들을 쫒아가서 한 명씩 택시에 태웠지만 마음만은 느긋하고 차분해졌다. 아이들이 모두 자리 잡고, 안전벨트를 고쳐주고 있는데 아이들이 앉은 모습을 보며 아저씨는 한 번 더 웃으며 말씀하셨다.
Oh bless them.
택시가 부드럽게 출발하고 나는 blessing이라는 말은 생각했다. Blessing 은 놀라운 빛을 내리쪼여주는 말이다. 축복이라니, 축복을 빌어준다니, 굳이 깊이 해석하고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냥 액면가 그대로 따스한 말이다.
그전까지는 상투적으로 주고받던 이 말의 따스함을 새삼 느끼며 나는 지루해지고 피로한 아이들의 장난이나 떼쓰기를 의식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갈 수 있음을 알았다. 오늘은 참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은 오는 길에 모두 잠이 들었다. 아저씨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잠든 아이들을 보시더니 내가 아이 셋을 2층까지 한 명씩 올려다 놓을 수 있게 문 가까이에 다시 주차를 해주셨다. 여러 번 주차 방향을 틀어서 차를 조금 어정쩡하게 세워주셨는데 표정은 시종일관 ‘bless them'이었다.
나는 서두르거나 조급해하거나 쫓기지 않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한 명씩 2층에 올렸다. 잠든 아이들 셋을 옮기는 길에, 평소에 낮잠을 자지 않는 6살 큰 아이만 깨고 작은 두 아이가 그대로 이어 자는 것이 성공했으니 타율이 좋은 성공이었다.
마지막 아이까지 2층 방으로 옮기는 동안 아저씨는 bless them을 한번 더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영수증을 건네면서 나에게도 축복을 전했다.
Bless you
너무 깊은 진심을 담은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상투적으로 그냥 내뱉는 말도 아닌 마음과 표정과 말의 내용이 어긋남 없이 하나인 그 담백한 일상의 말! 그 말이 그냥 듣기에 참 좋았다.
나는 한국에서 택시 기사분들께 듣던 단 한 마디의 칭찬의 말을 그냥 받지 않았던 것처럼 그날 만난 택시기사 아저씨의 단 한 마디의 말도 그냥 받지 않았다. 기사 아저씨가 나와 아이들에게 준 Blessing은, 우리가 이런저런 출산 장려책 대신 출산 축복으로 돌아가야 함을 비춰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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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낳으라고 낳는 것도 아니고 낳고 싶다고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또 출산은 연애와 파트너십에 대한 신뢰와 의지와 약속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 출산에 딸려오는 육아에 대한 기반과 대책이 있어야 감행할 수 있는 것, 또 육아는 우리나라에서 육아 이후에 건너갈 교육 영역에 대한 불안과 걱정이 크지 않아야 흔들림 적게 해 나갈 수 있는 것, 또 교육은 교육과 연결된 진로와 취업에 대한 공포가 적어야 올바른 방식으로 갈 수 있는 것, 진로와 취업은 은퇴 후의 자신의 삶을 통합 행복한 삶, 신뢰 로운 사회에 대한 전제가 기반이 되어야 가능한 것.
한 생명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이런 모든 사회의 연결고리들과 연애-결혼-출산-육아-교육-진로-취업-연애-결혼-출산, 육아, 교육, 진로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들의 연쇄를 굽이굽이 살펴보며 두드려보는 것.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한 마을이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온 국가가 하는 일이고 또 한 아이를 기르는 것은 단지 그 아이를 기르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석구석 기울어지고 헤어진 지점들을 정비하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
결국 출산율 저하는 다른 중요하고 시급한 사회적 쟁점들 가운데 하나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모든 쟁점들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면에서 결국 나는 애국하기 위해 아이들을 낳은 것은 아닐지라고 애국하기에 아이들을 낳은 것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출산 장려가 아닌 출산 축복의 사회, 모든 피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축복의 세례를 충분히 쏟아줄 수 있는 사랑 넘치고 신뢰 가득한 사회를 꿈꾼다. 아이를 길러나가는 길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난관들을 작게 해주는 사회를 먼저 고민해나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왔거나 앞으로 우리 곁에 올 모든 존재를 축복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해주는 것이다.
아이는 낳으라고 한다고 낳는 것도 아니고 낳지 말라고 한다고 낳지 않는 것도 아니고, 일단 낳으면 무조건 어떻게든 잘 길러주고 싶고 잘 길러내야 하는 축복의 존재들이니까.
덧 1.
지금까지 역사상에 존재한 (대부분 여성의 몸 통제에 집중해온) 모든 출산 촉진(혹은 억제) 정책을 나는 다시 생각한다. 출산율 저하 문제를 강조하고 출산 촉진 정책에 열을 올리는 모든 정책들이 수상하다. 여자라면 아이를 반드시 낳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사회가 동원할 수 있는 온갖 규범과 법률, 상식과 논리를 총동원해서 여성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유언의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출산 촉진 주의(pronatalism)는 불편하다. 과도하게 강조되는 모든 것이 어떤 현실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우리 사회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들지 않기 때문에 출산을 하라고 그토록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출산 촉진을 너무 강조하는 사회일수록, 출산을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온갖 혜택을 따로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출산을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망설이는 여성들에게 벌을 준다. 그런 사회일수록 여성의 선택과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일지도 모른다.
덧 2.
레타 호링워쓰는 1916년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 키우게 하는 사회적 장치 Social Devices for Impelling Women to bear and raise Children"라는 글을 통해 크게, 그 사회적 장치를 환상(Illusion)과 협박(bugaboos)으로 구분했다.
환상이란 좋은 면만 부각함으로써 엄마 되기에 딸려오는 여러 고통과 땀, 한숨을 외면하거나 은폐하는 것을 말한다. 그녀가 적시한 여성스러운 여성 'womanly woman의 기준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사회 속에 공기처럼 떠다니고 자주 우리의 의식에 어떤 여과 과정 없이 그대로 들어온다.
협박은 과학적 사실을 들이밀기와 같은 협박이다. 예를 들어 나는 삼십 대 초반에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노산의 위험 이야기를 들어왔다. 수많은 통계치 가운데 선택되고 크게 부각되고 계속 인용되는 통계치는 바로 이렇게 사회적 장치라고 불렀던 그 장치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이었다.
덧 3.
로마 시대에 시저도 Augustan Laws로 출산을 둘러싼 보상과 처벌을 했다고 한다.
덧 4.
출산 촉진 정책이든, 억제정책이든 그것이 정말 어떤 기대하던 효과를 발휘할지를 의심한다. 정말 우리는 낳지 말라고 한다고 낳지 않던가? 과거의 출산 정책들이 ‘촉진’과 ‘억제’ 정책들을 손바닥 뒤집듯이 짧은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떠들썩하던 구호를 완전히 바꿔버리던 것들만 살펴보아도 이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아주 짧은 주기로 계속되어온 과거의 출산 정책들과 구호들만 보아도 그 모든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일을 가장 인위적으로 몰아가려다 실패한 지점들을 그대로 보게 된다.
덧 5.
‘둘만 낳아 잘 키우자’ 던 출산 억제 정책을 위해 포스터에 동원되었던 가장 유명했던 가족에게 세찌가 있다.
덧 6.
출산 억제 정책을 위해 정부는 한 때 아파트까지 걸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