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익— 하는 소리

당신에게서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 당신만 못 듣고 있다.

"치익ㅡ 절단의 소리

맥루한의 "확장 = 절단" 이론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 기술이 인간을 확장할 때, 반대편에서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 칼날이 살을 가를 때 나는 그 "치익—" 하는 마찰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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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류수가 되고 싶었다


나는 노트에 적는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샤워실에서, 새벽 세 시 모니터 앞에서 — 떠오르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적는다. 문장이 아니라 파편에 가깝다. 반쪽짜리 문장, 의미를 알 수 없는 키워드, 느낌표 하나. 그런 것들이 노트 앱에 수백 개 쌓여 있다. 한때 나는 그것들을 언젠가 꺼내 쓰겠다고 다짐했다. 업무가, 마감이, 피곤함이 그 언젠가를 영원히로 바꿔 놓았을 뿐.


그러던 어느 날, AI에게 노트를 보여줬다. 파편들을 던져주고 말했다. "이걸로 뭔가 만들어봐." 결과물은 놀라웠다. 내 머릿속에만 웅크리고 있던 생각들이 처음으로 형태를 가졌다. 몇 달이 걸렸을 작업이 한 시간 만에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누군가에게 당장 보여주고 싶었다. 이것이 확장이다, 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순수하게 정제하고 싶었는데, 정제하는 힘 자체를 넘겨버렸다."


그 흥분의 뒤편에서, 아주 작은 질문 하나가 싹을 틔웠다. 이것은 정말 내 생각인가? 아니면 내 파편을 먹고 자란 다른 무엇인가?


그런데 나는 팔고 있었다


나는 AI를 A대리라고 부른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성격 더러운 신입사원. 나는 녀석에게 커피를 손수 내려주는 심정으로 지시를 내린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물론 녀석은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다. 어쨌든 녀석이 내놓는 결과물은 나쁘지 않다, 아니 나보다 훨씬 낫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금단의 열매 같은 맛이 난다.


처음에는 선택이었다. 이번만 써보자. 다음에는 직접 하지. 선택은 반복되었고, 반복은 습관이 되었고, 습관은 내 손가락에서 코드를 앗아갔다. 나는 더 이상 혼자서 함수 하나를 짤 수 없다. 아니, 짤 수 있지만 짜려 하지 않는다. 그 둘의 차이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AI 없이 소스코드를 짜려고 하다가도, 멈칫한다. 또 이러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지?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 A대리에게 다시 프롬프트를 쳐서 빠르게 개발하고 실행해본다. 모니터 속 코드가 줄줄 생성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깨에서 힘이 빠진다. 다행이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회의에서 동료가 말했다. "GPT한테 먼저 물어보고 올게요."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생각을 외주 주는 것이 출근처럼 당연해졌다. 기억을 꺼내 남에게 파는 세계는 SF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프롬프트 창을 통해 사고를 거래하고 있다. 다만 대가를 아직 모를 뿐이다.



확장이라 믿었던 것의 정체


그 위화감의 정체를 누군가 이미 말해 놓았다. 마셜 맥루한, 1964년. 모든 기술은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지만, 그 확장은 반드시 절단을 동반한다고. 자동차는 다리를 확장했지만 걷는 능력을 절단했고, 전화기는 목소리를 확장했지만 편지 쓰는 손을 절단했다. 확장의 반대편에는 언제나 시들어가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AI는 무엇을 확장하고, 무엇을 절단하는가. 사고력을 확장한다고 믿었다. 연구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AI 도구를 자주 사용할수록 비판적 사고 능력이 떨어진다는 결과가 나왔다. 표면적 숙달은 되지만 깊은 이해는 부재한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은 위축된다. 사고력도 마찬가지다.


더 무서운 것은 절단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맥루한은 이것을 나르시소스의 마비라고 불렀다. 나르시소스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매료되어 빠져 죽었다. 우리도 AI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확장된 모습에 매료되어 있다. 생산성이 올랐다, 효율이 좋아졌다, 나는 더 많은 것을 해내고 있다. 그 환호 속에서 절단은 조용히 진행된다.


나는 확장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절단되고 있었다.



치익—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돌이키라고 말하지 않겠다. 돌이킬 수 없다. AI를 쓰지 말라는 것은 자동차를 타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이미 도로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 잠깐이면 된다.


달리는 차 안에서는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속도가 빠를수록 눈은 앞만 본다. 지금 우리는 AI라는 고속도로 위에서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확장되고 무엇이 절단되는지 보이지 않는다.


멈추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 아니다. 자각하는 것이다. 삶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 지금의 일, 지금의 관계, 지금의 사고방식 — 이 형태들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 사라짐의 속도보다 한 발 앞서려면, 역설적으로 잠시 멈춰서 봐야 한다. 무엇이 오고 있는지,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도 새벽 세 시에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A대리는 옆에서 대기 중이다. 나는 녀석에게 프롬프트를 치려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이 멈춤이 답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멈추지 않으면 질문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나는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아니,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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