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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Jul 03. 2015

신형철의 평론 [몰락의 에티카]

 문학비평은 문학보다 더 급격하게 몰락했다. 그리고 이제 대중과 직접 접점을 갖는 비평은  영화비평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평의 기능이 예술 소비의 가이드라는 관점이 득세하면서, 미술과 영화처럼 큰 돈이 오고 가는 분야를 제외하고 비평의 몰락은 실로 철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신형철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가 출간되었다.


 신형철의 등장과 그 대중적 성공은 비평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시장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를 등단시킨 '문학동네'의 급속한 성장과 주류 문단과 평단의 지형 변화와 상호작용하면서 김현의 뒤를 잇는 스타 평론가가 되었다. 비평은 끝내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그래서 비평가는 창작자를 무릎걸음으로 따라와야 한다는 인식은 평론의 생산적 기능이 빠르게 위축된 90년대 이후 더욱 강고해졌다. 그리고 철학과 문학이론으로 중무장했던 과거의 비평이 스스로 독립적인 텍스트라고 주장하는 동안, 사람들은 비평을 읽어야 할 이유를 더더욱 찾지 못했다. 신형철의 소구 지점은 여기다. 비평이 스스로 텍스트로 환원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순간, 독자는 그 비평을 통해 작품으로 건너 갈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비평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절박하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8쪽, 문학동네


 문학은 다른 어떤 장르의 예술보다 몰락에 천착함으로써 일정한 예술적 성취에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영화를 포함한 비교적 짧고 진지한 서사 창작에서 몰락은 거의 빠질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왜 몰락에 그토록 매혹당하는 것일까, 늘 궁금해하던 사람들에게 신형철은 자신의 이유를 알려준다.


 나는 늘 몰락한 자들에게 매료되곤 했다. 생의 어느 고비에서 한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참혹하게 아름다웠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텅 빈 채로 가득 차 있었고 몰락 이후 그들의 표정은 숭고했다. 나를 뒤흔드는 작품들은 절정의 순간에 바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왜 중요한가. 몰락은 패배이지만 몰락의 선택은 패배가 아니다. 세계는 그들을 파괴하지만 그들이 지키려 한 그 하나는 파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면서 이긴다. 그들 덕분에 세계는 잠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이 질문은 본래 윤리학의 질문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몰락은 하나씩의 질문을 낳고 그 질문과 더불어 새로운 윤리학이 창안된다. 그러나 한국어 '윤리학'은 다급한 질문보다는 온화한 정답을, 내면의 부르짖음보다는 외부의 압력을 떠올리게 한다. 그 뉘앙스가 버성겨서 나는 저 말의 라틴어인 '에티카'를 가져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 같은 책, 책머리에


 [몰락의 에티카]는 마치 전설이 된 뮤지션의 데뷔 앨범처럼 신선하면서, 눈이 멀도록 번쩍였던 시인의 첫 시집처럼 야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는 대중 독자들을 향해 취향의 심미적 지향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자신의 비평은 문학을 옹호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생산하는 활동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한다. 


비평가는 시집과 소설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질문으로 전환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설사 시집과 소설책이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팔리지 않는 22세기 온다 해도 비평가는 실업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는 기어코 어디서든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을 비평할 것이다. 

- 같은 책, 16쪽


 김현이 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쓸모없음'에서 발견했다면, 신형철은 문학의 의미에 대해 보다 분명한 물성을 부여한다. 

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 말하자면 나의 진실에 부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날그날의 효율을 위해 이 질문을 건너뛸 때 우리의 정치, 행정, 사법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문학이 불가피한 것은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제도와 거기서 생산되는 문학 상품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저 질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모험들이 불가피한 것이다. 

- 같은 책, 14쪽


 이쯤 되다 보니,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 이전에 김현 이후 대중들의 인식에서 사라진 비평의 의의와 기능에 대한 개론서라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는 끊임없이 시와 소설이란 대관절 무엇인지, 혹은 무엇으로 인식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시는 '발화'고 소설은 '행위'라는 그의 요약 겸 주장은 요컨대 '문학의 몰락'이라는 클리셰에 답하는 대신 '몰락의 에티카'는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으로서도 이 책은 가히 백과사전급이다. 21세기 초 우리 문학의 현주소에 대한 총정리가 이 한 권에 담겼으니, 만약 오늘부터 한국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김영하, 박민규, 김훈, 배수아, 은희경, 이기영, 천운영, 편혜영, 김애란까지 2000년대 이후 문단과 시장에서 공히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소설가들과 김행숙, 남진우, 김경주, 이병률, 장석남 등 중요한 시인 전부를 일별 한다. 심지어 이상과 김수영, [무진기행], 황지우까지 돌아보고 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그의 완벽주의 결벽증은 이게 끝이 아니다. 끝내 '세대론'으로 쉽게 수렴하고 환원되는 비평의 굴레에 대해서, 그는 돌연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고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모르겠다'고 말한다는 것. 그것은 비평가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네가 실패에 대해서 무엇을 아느냐. 네가 실패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한낱 비평의 수사학에 불과한 것 아니냐. 나의 최근 글들에 대해 하시는 말씀인 줄 대번에 알아들었다. 선생의 목소리는 취기로 흔들렸지만 그 직진하는 취기 앞에서는 도망갈 틈이 없었다. 이미 아파하고 있는 곳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고, 나는 졸지에 헐벗은 과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잘 아는 것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면 나는 아무것도 쓸 것이 없지 않느냐, 는 말이 목에 걸렸지만 삼켰다. 맞다. 피 끓는 증오도 애타는 동경도 없는 삶이다. 그런 삶에 무슨 성공과 실패가 있겠는가. 나는 인간을 모른다.

- 같은 책, 7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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