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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쟌카 Apr 18. 2020

[꿈은 늙지 않는다] 숨을 죽이고 산 석 달

29년생 서울토박이 할머니의 글들

숨을 죽이고 산 석 달(나와 6.25)


    1950년 9월 24일, 집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어머니의 고집으로 나는 집에 머물기로 하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안양의 지인네로, 오빠네는 수원의 처가로 떠났다.


    어린 마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님의 그 때 담대한 결정에 탄복한다. 일제치하에서도 어머니는 늘 당당하셨다. 흐트러진 모습이나 당황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우리 집이 서울의 한 복판에 있었고 그 당시는 오직 한 가지 일편단심 나라 잃은 설움과 분함을 서로 달래셨으며 한 마음으로 뭉쳐 서로를 도우며 일본사람과 맞서 싸우신 것 같다. 더러 북 쪽으로 가신 분이 계셨지만 어머니께서는 그 때 자신이 애쓰시고 대접한 분들이 어찌 총 뿌리를 들이대겠냐 하셨다.


    우리 이웃에는 인쇄소를 하시던 어머니 선배님 댁이 있었다. 나를 딸같이 귀여워해 주셨는데 병으로 돌아가시며 어머니께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다 하셨다. 그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곤 했는데 더욱이 세상이 바뀌고 두 여인만 있으니 걱정이 되었는지 시도 때도 없이 개를 데리고 매일 들러 주었다. 그 때 우리 집은 ‘반동분자’라는 처지여서 아무도 찾아오기를 꺼려했다.


    6월 28일 서울에 인민군이 들이 닥쳐 방송국을 점령할 때까지도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만 내보내며 정부는 대전으로 후퇴했다. 정부 말만 믿고 미처 떠나지 못한 서울 시민들은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 후 한강 다리까지 끊겨 뒤따르던 선량한 시민들이 많이 희생됐다. 서울에 남은 시민도 반동분자를 색출한다고 인민위원회에 불려 다니며 암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머님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니 대문과 중문 사이 장작 쌓아 놓은 곳에 땅을 파서 항아리를 묻고 옷감을 안방 다락에 있는 반닫이 속에서 끌어 내시어 ‘너 시집갈 때 혼수감’ 이라며 차곡차곡 넣고 도로 흙을 덮고 감쪽같이 장작을 쌓아 놓았다.


    그 밤에 도둑고양이같이 작업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새우고 손이 부르트고 며칠간 몸살을 앓았다. 어머니의 재산목록 일호인 싱거미싱과 살림 등 더러는 도렴동의 오빠네로 옮겨 놓느라 힘들지만 어머니를 도와서 따라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곡식으로는 ‘미숫가루’를 만들고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준비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사랑방의 책을 안방에 옮겨와서 어머니 곁에서 읽었다. 늘 불안한 마음에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 공허한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의 오붓한 사랑 속에 정을 나누며 세계문학전집과 셰익스피어 작품을 한 번 더 읽을 수 있었던 그런 시간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해주었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무더웠다. 어머니와 뒷마루에 앉아 쉬기도 하고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텃밭 일도 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에 밀려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있는 상치와 푸성귀가 살며시 비좁은 사이에서 애처롭게 고개를 내밀고 자라고 있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쩌면 힘 있는 자, 힘 없는 자, 가진 자, 못 가진 자, 잘난 자, 못난 자의 자연의 이치로 그렇거늘 우리네 인생이야 말해 무엇하리오.


    나 자신을 돌아보니 꽃다운 스무 살이다. 부모님 곁, 유교적인 엄격한 가풍에서 도덕성과 바른 가치관을 가진 여성으로서 최고 학부인 서울대 사대 일 학년이다. 누가 나의 가는 길을 막으려 하는가. 어떻게 이 꿈을 접을 수 있단 말인가. 잡초를 뽑아 푸성귀의 자리를 넓혀 주며 ‘쑥쑥 자라라, 여린 것들아, 내가 지켜주마.’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새로운 희망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개를 데리고 그가 왔다. 서류 같은 종이를 보이며 써달란다. 신문로 일가 인민회 사무실에 붙인단다. 그는 먹을 갈고 나는 그가 써달라는 대로 땀을 뻘뻘 흘리며 붓을 들어 수십 장을 썼다. 그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고 나도 묻지 않았다. 북에서 떠들어 대는 선동구호였다.


가끔 이런 일이 계속되었지만 우리 모녀를 위해 이 마당에 그가 없으면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보살펴 주고 있지 않은가. 묵묵히 써야 했다. 무슨 모임, 부역 동원 등 나오라는데도 많지만 한 번도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의 가족이 막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한 가지 짐작이 가는 것은 그가 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팔 월 초로 기억한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 그가 왔다. 아침을 먹으려던 터라 어머니가 같이 들자니까 오늘이 자기 생일인데 나더러 자기 집에 가잔다. 어머니가 다녀오라 하셨지만 그 때까지 한 번도 그의 집에 가보지 않았어서 조금 어색했다. 그의 집은 앞 쪽은 인쇄소이고 뒤 쪽 안채가 우리 집보다 규모가 컸다. 심부름하는 아주머니가 한 상을 푸짐하게 내오며 아가씨 초대한다고 많이 차리라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느 때는 영화구경 시켜준다며 을지로에 있는 극장에 <석화>라는 러시아 영화를 보러 갔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북 쪽의 어느 지하 동굴에서 연인들이 석화 기둥을 돌며 숨바꼭질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지하 동굴의 석화가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기억이 없다. 그는 연희대에 그 봄에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키가 크고 체격이 듬직하니 믿음직하지만 나보다 한 살 아래였기에 동생이라 생각하고 편히 지냈다.


어머니도 남녀칠세부동석을 노래하시는 분이지만 선배의 아들이며 한 살 아래여서 편히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청춘남녀 사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 아닌가.


    숨 막히는 정세를 우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적막강산 같은 집에 그 외는 오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러던 구월 중순의 어느 날부터인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우리는 더욱 불안해졌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이기에 온 가족이 사라져 버렸을까.


정말 우리가 찾던 자유, 평등, 행복을 누리고 있는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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