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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람 Sep 03. 2016

익숙해지는 절망, 그리고 현재

헤르타 뮐러 - 숨그네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 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주인공이 여자아이인 줄 알았다.

남자와 만남을 갖는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으나 표지 자체가 무척 여성스러워 보여서 그냥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해 버렸던 듯하다.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알자마자 순간 밀려오는 당혹감에 첫 장부터 다시 읽어야만 했다.

동성애에 편견이 있는 건 아니고 단지 무감각할 뿐이지만, 주인공이 동성애자라는 것에서 놀라는 것을 보면 아직 그런 주인공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걸 느낀다. 어쩐지 벌써부터 입맛이 씁쓸해져 버렸다.


첫 시작은 주인공인 레오폴트가 수용소로 가면서부터이다. 그로부터 비로소 수용소에서 해방되는 그날까지. 그들은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욕구와 욕망을 억압당한 채, 매일매일 절망에 익숙해져 간다.

점차적으로 익숙해지는 절망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익숙함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강한 힘을 품고 있으니.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놀라울 정도로 익숙해지면서 결국에는 그것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소설 안에는 부서진 낱말들이 가득하다. 부서지고 찢기고 한 데 뭉쳐 자신들만의 언어를 이루어 내는 그 모든 말들이, 수용소 안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처참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그 단어들 때문에 오히려 읽는 내내 심장 한 구석이 뾰족한 무언가로 들쑤시듯 쿡쿡 아파왔다.

그것은 일견 잔혹하게까지 보인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

바로 옆에서 일하던 동료가 다음날 죽어 나가도, 그것을 슬퍼하기 보다는 빵을 훔치는 것에 급급하던 나날. 인간이기를 포기하며 그렇다고 짐승도 아닌.

그들은 배고픈 천사의 키스를 피하기 위해 숨그네를 덜렁거리며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견뎌낸다. 그래서 결국 배고픈 천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그들이 행복해졌는가 하면, 역시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레오폴트가 떠나는 것을 그렇게 슬퍼하던 가족들이, 레오폴트를 대체할 무언가를 찾고 점점 레오폴트를 신경 쓰지 않게 되다가 훗날 레오폴트가 그들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문득 느껴지던 당혹감.

그들은 수용소에서 벗어났음에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인생에 불과하다. 오히려 수용소 안에 있었을 때가 더 나았을까. 거기에서는 적어도, 존재 의미라는 것이 있었을 테니.


소설 속의 세상은 어떤 면으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기꺼이 희생하고, 제각각의 삶이 존재하며 반복되는 매일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배고픈 천사를 등에 매고 숨그네를 아슬아슬한 위치까지 삐걱거리면서 익숙한 절망을 끝없이 곱씹어간다.

한없이 허기가 지고 미치도록 공허하고 쓸쓸한.


숨그네를 읽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책을 붙들고 한참을 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되어 있는 이 문장들 때문이었을 거다. 어쩐지 담담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우는 것이 그만 부끄러워졌다.

수용소는 실용적인 세계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사치다.
흔들림 없이, 어설픈 만족감으로 시체를 처리한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감정과는 다르다.
죽은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줄어들수록 삶에 더 악착같이 매달리게 되는 듯하다.
그만큼 착각은 더 심해진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에 간 거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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