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혼자 슛 연습에 고군분투하는 내게 코치님이 다가와 말했다.
"전에 내가 한 말 기억나요? 발등으로 못 차겠으면 인사이드(발 안쪽, 아치 부분)라도 갖다 대라고. 그때는 공을 발등에 맞추기 어려우니까 그렇게라도 하라고 말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발끝이긴 해도 맞긴 맞고 있어요. 많이 늘었어요.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제가 조급해 보였나요?"라는 내 질문에 코치님은 "생각이 많아 보여서요"라고 대답했다. 내 망설임이 빤히 보이는 것이다.
수많은 축구 동작들이 어렵지만 내게는 슛이 제일 난해하다. 연습이든 실전이든, 슛할 타이밍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넣어야 하는데. 해내야 하는데.'
남들 앞에서는 말끝마다 '축구, 축구'거리는 '축구무새(축구+앵무새)'에다가 영하 15도에 한파주의보가 내려도 털모자 뒤집어쓰고 혼자 야외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드리블을 연습하는 열혈 축구인이지만, 사실 실력은 이 마음을 받쳐주지 못한다. 지난번에 한 골 넣었다고 자랑한 게 마지막 본 골 맛이다(오늘도 눈에서 물이 흐르네?).
심지어 그때도 축구 경력 6개월 만에 넣은 첫 골이었는데! 축구 인생만 9개월 동안 경기에서 해낸 나의 성적은 1도움, 1골. 이런 주제이다 보니 주 포지션을 '공격'이라고 밝히기가 부담스럽다. 공격다운 공격을 해본 적도 없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나를 감추기 위해 은근슬쩍 "저는 보통 공격에 서지만 풋살팀에 있기에 큰 의미 없어요. 수비할 때는 또 수비 열심히 봐요"라고 변명한다.
최근까지는 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느는 것 같았는데, 부상 이후 3주 가까이 쉬었더니 겨울이 찾아왔고, 야외에서 수업하는 팀 특성상 혹한기인 1월을 쉬어갔고, 자동적으로 내 실력도 쪼그라들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치른 타 팀과의 친선 경기가 어찌나 낯설던지. 혼자 우왕좌왕하던 나를 본 축구 동료가 "지은 언니 대체 어디 서 있는 거야!"라면서 꽥 소리를 질렀다.
그 친구는 나보다 열다섯 살 어린데, 오죽 답답했으면 한참 왕언니에게 저렇게 소리를 질렀겠나 싶어서 "아고, 몰랐어.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에 몰두하다가 경기는 끝나버렸다. 친구들은 혼자 엄한 데 뛰고 있던 나 때문에 4대 5로 싸우는 기분이었겠지? 미안해, 미안해.
왜 우리 팀 코치님은 9개월 넘도록 한 골밖에 못 넣은 나를 계속 공격으로 세울까? 물론 내가 스피드도 좋고 체력도 강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일 줄 알기 때문이라는 대답을 듣긴 했는데, 사실 이는 수비에게도 필요한 자질이다. 5대 5라는 풋살 경기의 특성상 끊임없이 자리를 스위치하며 뜀박질해 공간을 창출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코치님의 포지셔닝 선정이 의문이라는 내 말에 지인이 이런 격려를 주었다.
"지은님이 이타적인가 보다. 골 욕심 안 내죠? 그러니까 공격 세우는 걸 거예요."
남자 팀에서는 워낙 인재 풀이 다양하고, 개인기도 특출하며 구력도 오래된 사람이 많다 보니 다양한 유형들을 마주한다고 한다. 한 팀에서도 정말 무수히 사람이 들고 나고, 그중에서 유독 환영받는 이와 홀대받는 이가 나뉜다고 했다.
그중에 가장 꺼리는 대표 유형이 '이기적인 플레이'라고 한다. 축구 실력이 부족한 사람보다 혼자 공을 차지하며 분위기를 흐트러트리는 사람을 더 나쁘게 보고, 심하면 퇴출까지 시킨단다.
그러고 보니 축구 친구인 '별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언젠가 모 팀에서 함께 공을 차고 온 날, 그는 조용히 말했다.
"지은님, 여기는 앞으로 가지 마요. 다칠 것 같아."
주 구장이 비좁은 데다가 다들 실력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몸싸움도 필요 이상으로 거칠다고, 무엇보다 한번 공을 잡으면 혼자 개인기에 몰두하며 수비를 다 끌고 다니는 사람 때문에 제대로 된 팀플레이를 경험할 수 없다는 조언이었다.
'별로'는 축구를 잘하는 사람은 개인기로 상대를 돌파하는 선수가 아니라 패스해야 할 시기에 얼른 공을 남에게 넘기고, 곧이어 다시 패스 받을 자리에 가 있는 이라고 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는 동료를 믿고, 동료가 힘들 때는 얼른 그리로 달려가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 상대를 믿지 못하고 혼자 돌파하려다가 역습을 당하면, 그 모든 책임을 동료들과 나누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폐가 어디 있겠나.
생각해보면 나는 '최고가 되고 싶다', '남들만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팀 에이스 바우가 척척 공을 골대 안으로 쑤셔 넣는 모습을 보면 '멋지다, 바우. 너를 내 언니 삼고 싶다'는 생각은 들어도 '바우처럼 득점왕이 되고 싶다'고 꿈꾸진 않는다. 언젠가 같은 공격에 서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난 골 안 넣어도 상관없어. 어시스트 잘 하면 되지."
나도 그와 같은 마음이다. 아니, 어시스트(득점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에게 공을 보내는 일. 또는 그런 선수)도 아니고, 그냥 동료가 멋지게 골을 넣게끔 공 배급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 바로 어시스트의 어시스트를 노리는 거다! 어쩌면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슛이 엉망이어도, 매번 골대 앞에서 결정적인 순간들을 놓쳐도, 아무 데서나 쓸데없이 달리고 있어도 내 몸짓 하나로 내 옆자리 친구에게 어떤 기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내 동료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언젠가 우리 팀이 아마추어 풋살 대회에서 1위를 했을 때, 금메달을 받으며 '별다른 도움도 못 준 내가 이런 거 목에 걸어도 되나' 생각한 적이 있다. 도움되는 움직임은커녕 방해만 된 게 아닌가 싶다는 내 말에 한 친구는 이런 말을 건네었다.
"아니에요. 언니가 우리 팀 누군가와 부딪혔다는 거는 그만큼 많이 뛰었다는 거야."
그 말 한 마디에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한껏 펴졌고, 나도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그 따뜻한 마음에 보답하려면 연습밖에 없겠다. 너희 때문에 오늘도 동네 운동장에 공 차러 혼자 나온다. 우리 팀 어시스트의 어시스트왕이 되는 그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