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게 이렇게 특별할 일?
방송작가로 나름 빛나는(?) 삶을 살다가 30대 중반에 돌연 방송 일을 접고 평범한 회사에 들어갔다. 물론 내겐 평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배워야 하는 업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컴퓨터 프로그램이라곤 한글만 써왔던 내가, 산수도 잘 못하는 내가 회사 언어인 엑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게 난관 of 난관이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그놈과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보려는 야심찬 계획으로 시작된 첫 회사생활이었기에 그나마 감내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간신히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갈 무렵, 평범하지 않은 이별통보를 한 그놈 덕에 인생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인생이 통째로 흔들리는 기분을 그때 처음 경험했던 것 같다. 당연히 평범한 삶을 원했던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앙갚음이라도 하듯 회사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놈이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야심찬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다.
날 버린 걸 후회하게 해 주겠노라!
작가로 대성해서 찢어지게 배 아프게 해 주겠노라!
그렇게 시작된 백수 생활. 본격적인 글쓰기를 앞두고 세계문학전집 250권을 읽었다. 그것도 무려 5번이나!! 세계적인 대문호들의 머릿속을 파헤쳐서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엄청난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작가가 되기에 난 머리가 나쁘다는 걸... 이 책들이 왜 고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대문호들의 머릿속에 들은 게 뭔지는 손톱만큼도 알아내지 못했다. 2년 동안 내가 배운 거라곤 소설은 못 쓰겠다...였다.
벌어놓은 돈 다 까먹었으니 일을 해야 했고, 자격증으로만 존재했던 바리스타의 삶을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 일이 내 일상을, 몸뚱이를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사내 카페라는 특성상 러시아워 땐 음료가 30초 아니 10초 안에 나갈 때도 있다. ‘음료 나가는 시간은 카드 긁는 시간보다 빠르다.’는 게 사내 카페의 국룰! 그러다 보니 공들여서 음료를 만드는 게 아니라 1순위도 신속, 2순위도 신속이다. 무거운 믹서볼을 한 손으로 들어 컵에 따르고(팔뚝에 우락부락한 근육 생김 & 손목 나감), 냉장고로 뛰어가서 허리를 꺾어 준비해둔 음료(4L)를 꺼내고(허리 삐끗해서 한 달 동안 양말도 못 신음), 에스프레소에 초콜릿이 빨리 녹도록 손목을 신속하게 20번쯤 돌리고(손목 나감 2), 박스에 담은 단체 음료를 번쩍 들어 카트에 옮기고(허리 나감 2)… 쉴 새 없이 일하고 퇴근할 때쯤에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다리는 붓고 손목, 어깨, 허리는 쑤셔서 다음 날이 두려워질 지경이었다. 근육이완제를 먹어도 몸이 안 풀려 한의원, 정형외과, 내과를 번갈아가며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의료기기들을 사 모으는 게 취미(?)가 돼 버렸다. 몸은 축축 쳐지고 덩달아 자존감은 뚝뚝 떨어지다가 어느샌가 끝도 모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참 이상한 건 꼭 그렇게 바닥을 치면 글을 쓰고 싶어 진다는 거다.
바리스타 생활 1년 만에 다시 작가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엔 하던 일을 때려치우지 않고(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니까!) 남는 시간을 활용해 서울로 드라마 작법 수업을 들으러 갔다. 일이 끝나면 스터디 카페로 퇴근했고, 주말마다 서울로 학원을 다녔다. 내게 허락된 빈 시간은 오로지 글 쓰는 데만 전념했다. 그렇게 5년이 지났고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드라마 작가가 됐다. 친구만...
250권을 읽고도 소설이 뭔지 잘 모르겠더니 100여 편의 드라마를 보고도 드라마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도 포기가 안 된다.
'까짓 거 10년 아니 20년 보고 가자!' 라며 나를 위안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바리스타로 살아야 할지는 고민이 되었다. 왜냐면 물 마시려고 컵만 들어도 손목이 꺾일 정도로 통증이 심해서 정말 끝내야 할 때가 왔구나 생각하던 차였다.
때마침 8년 전에 그만둔 회사의 부장이 재입사라는 달콤한 제안을 해왔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때부터 돈의 노예가 됨- 6년간의 바리스타 생활을 청산했다.
작가가 되기 위해 그만뒀던 회사에 작가가 되기 위해 다시 들어갔다.
그렇게 ‘중고’ 신입사원의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작가적인 상상력을 뛰어넘는 온갖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다. 매일 머리에, 가슴에, 귓구멍에 총알 한 발씩이 꽂혔다!
그림 by LI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