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글이라는 것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간의 궁합이 맞아야 한다.
글쓴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읽는 이의 마음에 가 닿아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읽고 그에 반응하는 과정에 결함이 없어야 한다.
글쓴이와 읽는 이가 의기투합할 수 있는 이유는
각자가 가진 결함을 잘 알고 있고, 그 결함을 끄집어내서 위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소설보다는 인문학 서적을 더 많이 읽고 좋아했던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결함을 보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며, 인문학 서적을 통해 나만 아는 나의 결함을 찾는 게 덜 괴로웠기 때문이다.
소설은 결함 있는 주인공을 내세워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결함이 있다- 읽는 이를 괴롭히는 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소설보다 접근성이 좋은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정확히는 두 매체를 글로 쓰는 일을 공부하며 비로소 알게 됐다.
나는 글을 쓰기에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결함을 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함을 글에 녹여내고, 똑같은 결함을 가진 독자들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과정을 이겨낼 용기가 없었다는 것을.
글쓴이가 가진 결함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글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이 괴로워 글 쓰는 일을 포기하면 ‘결함으로의 소통’은 실패한 것이고, 읽는 이를 잃는 것이다.
내가 소설 속 주인공의 결함을 읽으며 괴로웠던 것은 그 결함이 내가 가진 결함과 같은 것이며,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결함을 고치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결말에 다다르며 결함을 고치거나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지만, 나는 그렇게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스스로를 괴롭히면서까지 소설을 읽어 내 상처를 끄집어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괴로운 일이라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이며 방어기제일 뿐이다.
소설이라는 가상 세계의 가상 인물로 대변된 인물의 결함이 현실 속 우리들의 공통 결함이라는 것을 공감하면 되는 거였다. 내 상처를 끄집어내기 싫어서, 나만 변화하지 못해서, 그게 괴로워서 피할 게 아니라.
읽는 이든 글쓴이든 마찬가지다.
서로가 가진 결함을 공유하고 공감하여 나아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나아질 수 없다 해도 서로에게 위로가 되면 할 일을 다 한 것이다.
글이 주는 위로를 십분 활용하여 힘들고 지친 삶을 위로받고, 잠시나마 희망을 얻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작거나 큰, 적거나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글을 읽는 사람이든.
그들이 ‘글’을 통해 서로의 결함을 꺼내 서로를 공감하고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글쓴이와 읽는 이는 서로를 깊이 신뢰할 것이다.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감사해할 것이다.
쓰는 이와 읽는 이가 만나
이 결함과 저 결함이 만나
그림은 이동욱 작가 <풍선풍경-빙하>, 2017의 일부
그동안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을 아껴주신 구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2편에서 또 만나요!
[지금 연재 중입니다]
월 : 오늘보다 행복한 날은 없는 것처럼
화 :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수 :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
목 :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금 : 오늘보다 행복한 날은 없는 것처럼
토 : 나를 일으키는 문장은 어디에나 있다
일 : 글이 주는 위로-글쓰기 예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