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재능에도 종류가 있다?
지금은 소설가이지만 15년 전 같이 영화를 공부했던 언니가 얼마 전 16부작 드라마를 제안받았다며 같이 쓰자고 했다. 5년간 드라마 공부를 해온 나에겐 엄청난 기회인 셈이다. 하지만 거절했다.
“이야기 만드는 것보다 이야기를 사는 게 더 재밌어요. 이제 드라마 말고 에세이 쓰려고요!”
글을 쓴다는 건 이야기를 만드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영화, 소설, 드라마를 써야 진정한 작가라고… 그래서 그 방향으로만 파고 또 팠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소설가, 시인, 드라마 작가가 포진해 있다. 정작 나는 작가 지망생으로 남아있고 하나둘 작가가 되어가는 것이다. 점점 조급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었고 가족과 친구들은 이제 그만 포기하라는 무언의 눈길을 보냈다.
묘하게도 그런 눈길을 느낄 때마다 오기가 생겼다. 지금까지 해 온 게 아깝기도 하고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에 포기가 안됐다. 하지만 오기로만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별의별 시도를 다 해도 내가 쓴 이야기는 2%(어쩌면 20%) 부족했다.
성과는 없고 시간은 성실하게 흘렀다.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점점 지치게 했고 다른 방면으로 촉수가 반응했다. 글쓰기 시동 거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다름 아닌 작법서 탐독이다. 책장에 꽂혀있는 작법서가 삼십여 권에 달한다. 그걸 수십 번 읽고 또 읽었다. 어쩌면 글을 쓰는 시간보다 작법서를 해석하는 데 더 투자했는지도 모른다. 작법서를 통해 배운 게 많지만 역시 작법서는 작법서일 뿐이다. 글로 표현해내지 못하면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나 다름없다.
정말 글을 쓰는 재능이 없는 걸까?
이대로 작가의 삶을 포기해야 할까?
포기를 꺼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 즈음 작법서 <글쓰기 특강>을 만나게 됐고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동안 갖고 있던 ‘글에 대한 편견’이 지워졌다고 해야 할까?
글의 종류가 다양하듯 글을 쓰는 재능의 종류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만이 글쓰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해서 놓치고 있었던 진실을!
이야기를 만들기보다는 이야기를 살아가는 데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가상의 인물이 살아내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실존 인물이 살아가며 만드는 이야기를 더 잘 표현해낼 수 있는 게 아닐까?
방송작가일 때 주로 썼던 분야가 휴먼 다큐인 걸 보면 그쪽이 내가 쓰는 글 방향과 맞았는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출연자 섭외하고 방송 내보내는 게 급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내가 갈고닦을 전문분야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만드는 재능보다는 살아낸 이야기를 표현하는 쪽에 더 관심이 있고, 인문학 그중에서도 심리학과 철학에 매료되었던 이유!
글이란 게 결국엔 하나로 귀결되는 것이라 해도 그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고 그 길 중에서 지금의 길, 이야기를 살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나중에 소설도 꼭 써봐. 에세이만 쓰지 말고!”
소설가 언니의 조언이다.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글쓰기 재능이 에세이로 흐르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재능이 아니라 해도 지금 재미있는 글쓰기를 하려고 한다. 나를 들여다보고 파헤치는 일이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