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어쩔수가 없다
몇 일 전, 예고 없는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구글에 오랜 시간 재직하다 하루아침에 실직한 여성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전날까지 열정을 다했던 일터에서 출입과 로그인을 즉각 차단당했던 그녀의 황망한 경험을 들으며, 타인의 일임에도 저 또한 그녀와 함께 원통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 기간 회사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바친 사람을 칼로 무 자르듯 끊어내는 조직의 냉정함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저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8년의 직장 생활 후 육아로 인한 4년의 공백을 깨고 어렵게 다시 잡은 기회였습니다. 비록 계약직이었으나 재택근무의 유연함과 수평적인 문화는 일과 육아 사이에서 균형을 갈망하던 제게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였습니다. 1년간의 재직 기간은 제게 단순한 수입 그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사라졌던 자존감을 회복하고, 일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쓸모를 증명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열심히 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소집된 회의에서 들려온 '계약 연장 불가' 소식은 마치 정성껏 준비한 만찬에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니 이제 그만 상을 치우라는 선고처럼 허탈했습니다. 1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루틴은 방향을 잃었고, 갑자기 쏟아진 시간 앞에서 저는 무력해졌습니다. "회사의 상황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라고 씩씩하게 되뇌어 보았지만, 꿈속에서조차 업무를 수행하는 제 무의식은 이 갑작스러운 단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운명처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 없다>를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 만수(이병헌 분)는 제지회사에서 25년간 재직한 베테랑이지만,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취업 전선에 내몰립니다. 가족의 생계가 오로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재취업을 노리지만 실직 기간은 길어지기만 합니다. 결국 키우던 강아지들을 장모님 댁으로 보내고 집까지 내놓아야 하는 처지가 되면서, 만수는 자신의 경쟁자의 자리를 뺏기 위해 처절하고도 위험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분분합니다. 서사의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배우들의 연기가 다소 과장되었다는 지적도 적지 않더군요. 하지만 ‘나의 위기가 곧 가정의 존립을 흔들 수 있다’는 벼랑 끝의 불안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압니다. 그 절박함 앞에서는 이성적인 개연성보다 더 강력한 ‘생존의 논리’가 작동한다는 것을요. 그 마음을 아는 이들에게 만수의 행보는 단순한 연기를 넘어선 처절한 현실의 투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필 이런 상황에 이런 영화를 보게 된 것이 말 그대로 '웃펐습니다'. 실직 후 막막해하는 만수의 표정과 말 하나하나가 제 상황과 겹쳐 보여 깊이 공감되었죠. 심지어 용서받기 힘든 그의 극단적인 선택조차 한 번쯤 상상해 보았을 법한 맥락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가 제 상황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복잡하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삶의 무게는 여전히 같지만, 지금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한 발 뒤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고 할까요. 이것이 바로 블랙코미디가 가진 힘이겠지요. 극 중 만수는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을 겪으며 깨달은 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실행 단계에서는 집요하고 대담해야겠더라고요" 비참했던 그 여정조차 결국 그에게는 새로운 깨달음의 자산이 된 것입니다.
실제로 스탠퍼드 대학교의 존 크럼볼츠(John Krumboltz) 교수는 성공한 커리어의 80%가 '예상치 못한 우연'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응하는 태도라는 것이죠. 호기심과 낙관성, 그리고 유연함이 있다면 예상치 못한 충격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안티프래질(Antifragile)'의 동력이 됩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말했습니다.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 인생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흐름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그저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어쩔수가 없다>인 것처럼 말이죠.
만수의 여정이 정답은 아니겠지만, 그가 말한 '발상의 전환'과 이동진 평론가의 신념을 빌려 이 시련을 다시 바라보려 합니다. 지금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이 위기를 수용하고, 이것이 또 다른 기회를 향한 문을 열어줄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가족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지고 현실이 막막한 분들이 계신다면 만수의 여정을 통해 한 번쯤 크게 웃어넘겨 보시는 건 어떨까요. 삶의 무게가 당장 가벼워지지는 않더라도, 그 무게를 다시 짊어지고 걸어갈 용기만큼은 슬그머니 생겨날지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