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꼭 듣고 싶어 했던 '내가 겪은 성장 스토리'
글을 쓰게 하는 건 역시 약간의 강제성이 필요하다. 지난주 금요일 내가 가장 오래 활동하고 애정하는 커뮤니티 <컨티뉴어스 클럽> 커넥터 교육에서 나온 숙제 덕분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혼자서 쓰기는 외롭고 지속하기 어렵기에, 내 글의 오너십을 공유할 친구를 만들어 서로 글을 의뢰해 보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희한하게도 속도가 나질 않았던 홀로 글쓰기는 마감기한이 있는 글로 의뢰를 받으니 미친 듯이 써지기 시작했다. 무언의 책임감과 약간의 압박감이 날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내 첫 글의 프라이언트(Friend+Client)는 <성장>이라는 큰 주제에서 3가지 기법으로 아래 질문들을 의뢰해 주었다.
본격적으로 질문에 답변하기 앞서 내가 걸어온 10년간의 커리어를 짚고 가는 게 좋겠다. 대학생일 때는 '디자인 에이전시'를 들어가서 고생하며 실력을 쌓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 생각하여, 3년 간은 두 번의 에이전시에 몸 담았었다. 에이전시 특성상 빠르게 프로젝트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여러 산업군의 회사들의 일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압축적으로 많은 회사의 프로젝트를 경험했지만 한 분야에 깊게 고민하거나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기는 어려웠다. 갈증이 있었던 그때 마침 인하우스로 일하는 문화인 IT 스타트업이 급성장했다.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또다시 나는 새로운 환경인 '스타트업'으로 발을 한 발자국 내딛게 된다.
스타트업계에 들어선 순간 커리어에 있어 다양한 기회와 경험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매일 배우고 성장하려는 의지만 있어도 회사와 함께 개인도 가파르게 성장하는 경험을 숨 쉬듯 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스타트업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극초기/성장 초기/성장 중기 단계 등 다양한 규모의 스타트업을 경험하게 됐다. 각 기 다른 단계의 스타트업을 경험하면서 느낀 특징과 어떤 단계를 가장 즐거워했는지 적어보려 한다.
- 2015 ~ 2017 : UX 컨설팅, 디자인 에이전시 UX 디자이너
- 2018 ~ 2020 : 성장 중기 단계 중규모 B2C 스타트업 프로덕트 디자이너
- 2020 ~ 2024 : 극초기 단계 B2B 스타트업 첫 프로덕트 디자이너
- 2024 ~ : 성장 초기 단계 소규모 B2B 스타트업 디자인팀 리드
초창기 → 소규모 → 중규모의 스타트업을 경험하면서 각 규모 별 특징과 의사결정 방식은 어땠는지 듣고 싶어요.
특징: 자본, 사업 방향성, 일하는 방식, 팀문화, 속도(실행/의사결정), CEO 역할, 구성원들의 역할, 중간 리더의 필요성, 단계에 따라 구성원의 느끼는 점(마음가짐), 커뮤니케이션 방식, 업무 시스템(툴/체계/프로세스/보안), HR(핵심가치/평가/교육/보상), 근무환경 등
*팀/비즈니스 상황에 따라 아래의 특징은 달라질 수 있다.
자본은 가장 없지만 팀 분위기는 가장 말랑 말랑하며 희망찬 단계이다. 열정의 온도가 높은 단계라 가장 속도 가 빠른 구간이다. 생존 때문이라도 모두가 매일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만들어보고, 다시 또 수정하고, 고객을 만나 반응을 살핀다. CEO를 포함하여 극초기 단계 멤버들은 모두가 리더처럼 일하고, 역할 구분 없이 모든 것을 해내며, 스스로 의사결정을 한다. 그래서 초기 창업팀 멤버들 간의 케미가 가장 중요하다. 나중에 자리 잡는 문화는 거의 초기 멤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맞닿아있게 된다.
경험 상 이 구간의 CEO는 핵심 인재 채용에 시간을 많이 할애한다. 그만큼 우리와 결이 맞고 좋은 팀원분들을 초기에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때에는 체계, 규칙, 문화랄 것이 거의 없기에 구성원들은 이런 환경에 익숙해야 한다. 완벽한 시스템, 문화 등은 일단 생존한 다음에 고민해 봐도 좋다. 자연스럽게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들이 곧 문화가 되고, 시스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물론 C레벨들은 조직 문화 철학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고민이 필요하다. 초반에 과도한 문화/시스템을 잡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는 뜻)
적합한 인재들이 채용되면서 적절히 역할이 쪼개지기도 하고, 팀 문화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다. 우리답게 일해서 성공했던 사례들이 생겨나면서 '핵심 가치'들이 하나둘씩 탄생한다. 오히려 극초기 때보다는 팀 분위기가 단단해졌던 것 같다. 초창기에는 정신이 없기도 하고 체계랄게 없기 때문에 갖춰져 있는 게 거의 없는데, 결이 맞는 구성원들이 들어오면서 부족했던 것들이 점차 채워지기도 하는 시기이다.
개인적으로 이 단계에서 CEO는 '자본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과 '다음 마일스톤을 준비하는 것'에 계속 몰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소규모 단계이기에 아직도 실무자형 리더처럼 일할 수 있다. 아마도 CEO가 더 이상 모든 것을 관여할 수 없는 단계에 오면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위임하기 시작할 것이다. 초기 멤버나 공동창업자는 CEO가 가장 중요한 역할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함께 논의하고 도와줘야 한다. 나는 그 역할을 잘해주지 못해서 무척 아쉬웠다.
구성원들은 제품-시장 최적화를 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많은 회의-실행-수정-배포 사이클을 돈다. 내가 시간에 끌려다는 것처럼 하루가 지나가는 속도가 빠르다. 이 단계에 고객들을 가장 많이 만나 기뻐하기도, 잦은 실패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또 기술부채가 쌓이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해관계자들끼리 속도 vs 품질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다가 결론이 나질 않은 경우도 허다하다. (매일 같이 계속되던 100분 토론으로 편두통이 자주 찾아오기도...) 피 튀기듯 서로 말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남아 문화가 되기도 해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구나 생각한다.
마을에서 부족 단위로 넘어가는 1차 격변의 단계. 매출 or 팀적으로 스케일업을 한다. 제품이 어느 정도 워킹이 된 다음에 시장진출 최적화를 하는 동안 여러 문제가 발생하며, 팀적으로 스트레스가 올라간다. 조직이 급격히 팽창할 경우 당연히 문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경험 상 이 구간에 일하는 방식과 핵심가치가 변화했다. 덕분에 우리만의 그라운드 룰이나 나름의 체계를 구축하고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CEO 역할이 점차 확장되면서 이제는 선택과 집중을 할 시기가 찾아온다. (CEO 역할 변화. 특히 미션과 전략 구체화 필요.) 구성원들이 40~50명쯤 넘어가게 되면 이제 어떤 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가 어려워진다. 이때 중간 리더십의 필요성도 대두된다.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HR을 신경 쓰게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보는 눈이 많아지기 시작하기에 예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의사결정하기가 어려워진다. 때문에 의사결정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고 불필요한 회의가 많아지고 길어진다. 또 다른 변화는 기존 초창기 멤버의 역할이 모호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CEO 및 주요 리더들은 초창기 멤버들이 각자의 역할을 알맞게 전환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1차 격변의 단계의 만큼 서로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 변화에 적응하고,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의식적으로 언러닝 할 필요가 있다. 서로 맞지 않아 초기 멤버를 과감하게 자르는 의사결정을 하기도 하며, 슈퍼스타가 퇴사하는 경우도 있고, 신규 입사자가 적응을 잘하지 못하고 퇴사하는 경우도 생겨나는 구간이다. 하지만 격변의 후폭풍은 언젠가는 지나가기 마련이다. CEO 및 주요 리더 그리고 구성원까지 모두가 무사히 견뎌내고, 부디 다음 성숙 단계로 건너가길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이 구간이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제는 100명이 넘어가면 누구 팀에 누가 있는지, 신규 입사자가 언제 들어왔는지 잘 모르게 된다. 팀으로나 사업적으로나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외부 전문가를 모셔서 한 번 분위기가 확 전환되기도 한다. 극강의 효율성 마련하기 위해 대규모의 조직을 개편했는데, 이때 초기 멤버들은 '우리 회사 분위기 예전 같지 않다. 모든 것이 변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런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이 시기엔 성장 중기 단계에서 성숙 단계까지 급격히 빠르게 팽창하는 것이 과연 조직에게 정말 좋은 일인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팀이든 제품이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속도에 맞춰 지속가능하게 성장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재작년부터 올해까지 시장 상황이 안 좋을 때 대규모 희망퇴직이 많았고 스타트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존 단단하게 자리 잡은 문화와 시스템은 유지가 된다. 번창하는 시기에 생겨났던 새로운 중간 리더들로 인해 속도가 더뎌지기도 한다. 사람이 많아진 이유로 경영진과 구성원들 간의 거리 격차도 커지면서 서로 이해가 안 되는 현상들이 발생하게 된다. 경험 상 이때 경영진들은 기존의 의사소통 방식이나 의사결정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구성원들과 함께 적응을 하려 노력했던 것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구성원으로서 경영진에게 극심한 변화를 무리하게 요구했던 것은 아닐지 반성하게 되기도...
퇴사자가 가장 많이 생기는 구간이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프리라이더 때문에 열심히 하려는 구성원들이 점차 소진되며 나가는 것이다. 이때 새롭게 대두되는 것은 '납득 가능한 공정한 보상'. HR이 한층 업그레이드된다. 구성원들로부터 구체적인 평가/보상/성장 시스템 마련을 요구받는다. 제품 및 사업적으로는 글로벌 확장 및 사업 다각화를 준비하고, 우리 서비스만의 더 뾰족한 차별화 포인트를 갈고닦는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많은 인원들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고 어려울 때 갑자기 공중분해가 되기 십상이다.
이제 막 서비스/브랜드를 시작하는 팀에게 '페르소나'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요.
서비스에서 흔히 말하는 '페르소나'란 쉽게 말하면 '인격 모델'이다. 이 서비스를 사용할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고 어떤 환경에서 해당 인물의 성격에 따라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에 대한 예측 모델인 것이다. (페르소나와 실제 우리의 고객은 다를 수 있다.)
초기에 서비스와 브랜드를 만드는 팀에서는 자신의 페르소나와 타깃 페르소나를 꽤나 구체적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바라는 서비스/브랜드는 어떤 이미지 인지, 어떤 톤으로 말하는지,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는지 등 다양한 접점에서 구체적인 상을 그려내야 다른 서비스/브랜드와 차별화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창기 단계일수록 시간과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모든 상을 만족시키면서 사랑받는 서비스/브랜드를 만들어내기엔 불가능하다. 내가 경험했던 모든 스타트업은 구체적인 타깃 페르소나는 있었으나, 자신의 서비스/브랜드 상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던지는 키워드 및 메시지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고 타 서비스에 비해 차별화 포인트가 부족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간, 에너지, 자본을 썼었다.
돌이켜보면 조급해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이 들더라도 완벽하지 않더라도 초기팀은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를 최대한 뾰족하게 세워보고, 그것에 맞춰서 서비스를 구축하고 운영해봐야 한다. 그래야지만 서비스/브랜드만의 성격이 점차 뚜렷해지고, 우리가 생각한 상이 막상 시장 밖에서 고개에게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뭐가 맞았고 뭐가 부족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사람으로 비유한다면 한 사람의 성격이 쌓여가는 시간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나만 해도 아직 뾰족할만한 아이덴티티가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이니 서비스/브랜드를 단 몇 년 만에 딱 맞는 상을 그려내는 게 쉽겠는가. 그리고 페르소나는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격체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초기 팀에게는 서비스/브랜드 페르소나란 '비즈니스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실행하게 하는 기준'이라 생각한다.
스타트업 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규모는 어느 단계인가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본성 관점에서의 이유가 궁금해요.
아무래도 가장 사랑하는 놀이터는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상태인 가장 극초기 스타트업 단계. 누군가에게는 체계도 문화도 자원도 돈도 없는 삭막한 사막에 왜 굳이 가려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특유의 날 것 그대로의 자유분방함, 모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찬 근자감, 10명도 안될 때의 빠른 호흡, 24시간 모두가 아이디어로 미쳐있는, 모든지 변화할 수 있고 매일 성장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날 가슴 뛰게 만든다. 누군가는 나보고 <초기 스타트업만 찾아다니는 변태>라고 할 정도이니. 그만큼 말랑말랑한 초기 분위기를 정~말 애정한다! 그때의 시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기에 더 소중하달까.
기질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적부터 항상 소수 마이너 집단에 가장 빠르게 합류하는 것에 벅차했고, 늘 새로운 것을 찾아다녔다. 모든 것에 빨리 질려하던 성격 탓에 변화가 늘 반가웠고 적응력도 빨랐다. TCI 검사 결과를 보면 기질에 해당하는 <자극추구> 항목이 89/100이나 되고, 반대로 <위험회피>는 9/100에 해당된다. 확실히 모든 분야에 탐색적 흥분이 높은 상태고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낮은 덕분에 초기 스타트업이라는 사막 같은 환경을 좋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직접 경험했던 규모별 각 스타트업의 특징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기질과 성향을 가진 분들이라면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 경험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값진 경험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 터닝 포인트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초기 스타트업에서의 성장 과정'은 단연코 엄청난 경험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경험, 팀 문화의 중요성, 지속적으로 배우고 압축적인 성장을 몸소 겪을 수 있었다. 물론 스타트업 생태계는 아직도 불안정하며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많다. 하지만 재미있고 스스로 얻어갈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게 아직도 나를 이 업계에 머물고 싶게 만든다. 향후 5년 동안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지난 7년간의 스타트업 경험은 나에게 단단한 기반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시간들은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나를 빚어냈으니.
*참고로 위 내용은 직접 겪은 스타트업 특징만을 설명한 것이며, 실제 스타트업의 특징과 성장은 다양한 요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더 궁금한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