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회용 필카를 샀다

<디스포저블 필름 스케치> 태동기

by 안승환

"사진을 잘 찍으려면 무슨 카메라를 사야 돼요?"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종종 듣는 질문이다. 왜 이런 질문을 듣는건가 살짝 추측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처럼 사진을 찍고 싶어한다. 한눈에 확 들어오는 예쁜 색상, 깔끔한 구도, 강렬한 피사체.

물론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게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술 분야가 특히 그렇다. 사진 역시 거기에 포함되므로 그런 것을 결정할 기준이 굉장히 모호하다. 하지만 좋은 사진이 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내가 만족하는 사진이다.


포토그래퍼 데뷔전. 안승환 본명으로 참가했다.

지난 11월 인사동에서 진행한 '미틈달의 필름 스케치' 사진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는 공식적인 포토그래퍼가 되었다.(여기서 '츄르'라는 활동명을 정하게 됐다.) 올해 전국을 돌면서 내가 만든 독립출판물을 팔면서 기념품으로 엽서, 포토카드를 제공해오고 있었다. 내 사진이 그다지 특별하다거나 잘 찍었다는 생각은 전혀 없으므로 간단한 퀴즈 이벤트 보상을 완수하면 무료로 제공했다.

그런데 이번 전시를 통해 내 사진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면서 그에 따른 액션이 필요했다. 공짜로 나눠주던 엽서, 포토카드를 굿즈라는 전문적인 카테고리를 매겨 가격을 부여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굿즈라는 걸 판매해본 적이 없어 과연 잘 될까 의문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판매가 실제로 이루어졌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촬영한 '추밀' 청동상

"글귀를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돋았어요..."

내 테이블에 놓인 샘플용 포토카드를 본 한 여성 독자분이 직접 내게 이렇게 말하며 1,300원짜리 포토카드를 구매해갔다. 예술가의 마음이나 심오한 의도를 갖고 촬영하고 제작한 포토카드가 아닌데 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런 현상에 나 역시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Leica X TYP113 안승환 Edition

나는 라이카를 사용한다.라고 하면 '오~ 역시'라면서 사람들이 과도한 기대감을 갖고 내 사진을 바라본다. 그걸 원해서 라이카를 산 게 아니었는데.(보급형 모델을 중고가 100만 원에 구매한 녀석이다.) 물론 나의 철학을 좋아해주는 분들이 많아 뿌듯하긴 하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카메라의 브랜드를 지우고 셔터를 누르면 사람들은 어떻게 나의 사진들을 봐줄까? 전문적으로 사진을 배운 적은 없지만, 내 사진에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유머와 스토리가 담겨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든 그렇다.


내 책을 보러 온 독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회용 필름 카메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강조했다. 장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면서 양심에 찔렸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라이카로 촬영한 사진을 내밀면서 그런 멘트를 하다니. 무책임하다는 죄책감이 피어오른다.

즉흥적으로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을 모아 사진집을 만드는거다. 다음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뜬 '일회용 필카 평생 쓰는 꿀팁!' 영상을 보게 됐고, 필름 현상은 커피를 통해 셀프로 할 수 있다는 블로그 글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커피는 쉽게 구할 수 있고, 필름 현상소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아이덴티티가 뚜렷하다. 안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당근에서 10,000원에 구매한 새 것 같은 중고

<디스포저블 필름 스케치>는 그렇게 탄생했다.


* '필름 스케치'라는 문구에 강하게 끌려서 '미틈달의 필름 스케치' 총괄님에게 직접 부탁해 문구 사용 동의를 구했다. 정말 만족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