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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다미로 Jan 07. 2022

아무도 도와주지 마

교실 에세이 #3. 실패할 기회





 재훈(가명)이는 소극적인 어린이였다. 얼마나 소극적이냐면 음료수 뚜껑을 여는 것이 어려워도 혼자 낑낑거릴 뿐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애처로운 눈으로 선생님이나 친구를 바라보며 먼저 도와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과자를 먹을 때도 마찬가지, 과자 봉지를 들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이미 과자를 뜯어 맛있게 먹고 있는 친구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재훈이는 늘 음료수를 마시고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주변의 친구들이 먼저 나서서 뚜껑을 열어주고, 과자 봉지도 뜯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처한 재훈이를 도와주는 착한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지만, 나는 친구들의 자발적인 도움 때문에 재훈이가 '실패할 기회'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임 선생님께 내 생각을 전했더니 마침 담임 선생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셨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아이처럼 보이는데 왜 하지 않는지, 정말 할 줄 모르는 것인지 궁금했다는 고민을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이야기 끝에 재훈이에게 '충분히 실패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 먼저 도와주지 마

 우선 담임선생님은 재훈이가 특수학급으로 간 시간에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실패할 기회'에 대해 설명했다.

"얘들아, 그동안 재훈이를 잘 도와줘서 고마워. 너희들 덕분에 재훈이가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었어. 하지만 오늘부터는 재훈이를 도와주지 마. 우리는 재훈이에게 '실패할 기회'를 줄 거야. 여러 번 실패하다 보면 재훈이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길 거야."

"선생님, 그럼 옆에서 방법을 알려주면 안 돼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방법을 알려주는 것은 재훈이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을 때만 알려주자. 그리고 방법을 알려주거나 일부를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재훈이가 해야 할 일을 완전히 대신해주지는 말자."


 한편, 재훈이는 특수학급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말하기를 연습했다. 

"재훈아, 앞으로는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먼저 도와주지 않을 거야. 재훈이 간식은 재훈이가 스스로 먹을 수 있어야 해. 뚜껑도 열 줄 알아야하고 빨대도 꽂을 줄 알아야 해. 물론 과자 봉지도 스스로 뜯어야겠지."

"저는 못해요."

"아니야. 할 수 있어. 해보지 않아서 그래. 정말 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몰라요."

"주변에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도와주세요, 도와줘'라고 도움을 요청해야 해. 네가 직접 말해야 해."


| 눈물 젖은 음료수

 점심 식사로 종종 음료수가 나온다. 대개 뚜껑을 돌려 여는 형태의 음료수인데, 손아귀 힘이 부족한 저학년 어린이들은 선생님들이 열어주시거나 힘이 많이 들어가는 첫 부분만 열어주어 아이들이 손쉽게 뚜껑을 열어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 하지만 고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뚜껑을 열어본 적이 거의 없는 재훈이에게 음료수 뚜껑 열기는 넘어야 할 큰 산이었다. 

 그날도 점심 식사에 음료수가 나왔다. 친구들은 일찌감치 음료수를 뜯어 마신 후 자리를 떴지만 재훈이는 음료수를 손에 쥔 채 낑낑대고 있었다. 그리고는 눈물 고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재훈아, 왜? 음료수가 잘 안 열려?"

"네. 그냥 음료수 안 먹을래요."

"음료수 먹고 싶지 않아? 하기 어려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도와주세요."

"그래, 선생님이 조금만 도와줄게."


 나는 재훈이가 뚜껑을 잡고 조금만 돌리면 열 수 있을 만큼 뚜껑을 열어주었다. 재훈이는 음료수를 받아 들고 남은 뚜껑을 스스로 열면서 말했다. 


"열었다..."

그리고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하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재훈이는 그날 이후로 음료수가 나오는 날이면 음료수를 선생님께 내밀며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담임선생님과 나는 재훈이가 스스로 열 수 있기를 기대하며 뚜껑을 열어주는 범위를 점차 줄여나갔다. 이제는 제법 요령이 생겼는지 아주 열기 힘든 음료수가 아니면 스스로 뚜껑을 열어서 마신다. 내 힘으로 뚜껑을 열어서 마시는 음료수 맛은 얼마나 꿀맛일까.


| 선생님, 가위 주세요.

 간식으로 과자가 나오면 아이들마다 과자 봉지를 뜯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대부분 '뜯는 곳'을 따라 찢듯이 봉지를 뜯고 아주 가끔 손아귀 힘이 좋은 아이는 봉지를 찢지 않고 연다. 그리고 가위를 이용해서 깔끔하게 봉지를 잘라서 여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재훈이도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며 아이들이 지나온 길을 걸어가는 중이었다.
 스스로 하기를 시작한 후 재훈이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는데, 바로 아이들을 관찰하는 습관이다. 간식을 먹을 때 친구들이 어떻게 하는지 가만히 보고 있다가 비슷하게 따라 해보고 그러다 안되면 도움을 요청한다. 여러 번의 관찰과 도전 끝에 재훈이가 선택한 방법은 '도구 사용하기'였다.
 담임선생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날 간식으로 나온 과자를 받자마자 재훈이가 '선생님, 가위 주세요.'라며 가위를 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는 아주 여유롭게 봉지를 잘라서 과자를 꺼내 먹었다고 했다. 담임선생님은 가위를 빌려달라기에 '설마?'하고 생각했는데 스스로 봉지를 자르는 모습을 보고는 절로 웃음이 났다고 하셨다.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지면서 한편으로는 재훈이가 과자를 먹을 때의 그 표정을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주 아쉬웠다. 재훈이는 얼마나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과자를 꺼내먹었을까.


|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하면 돼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터득한 재훈이가 눈물을 쏟은 사건이 있었다. 통합학급에서 학기말에 책거리를 하며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활동인 '컵라면 파티'를 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보고 싶었던 영화를 고른 후, 컵라면을 뜯어 수프를 붓고 뜨거운 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차례로 돌아가며 뜨거운 물을 부어주었다. 어쩐 일인지 재훈이도 용케 준비를 마치고 뜨거운 물을 받았다. 아이들에게 물을 부어주고 돌아서는 선생님을 재훈이가 불렀다.


"선생님, 물이 자꾸 나와요."


선생님께서 재훈이 쪽을 돌아보니 재훈이 책상에 흥건하게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재훈이 눈에도 금방이라도 흐를 것처럼 눈물이 고였다. 책상과 바닥에 흐른 물을 닦고 컵라면을 확인하던 선생님은 컵라면 바닥에 조그맣게 구멍이 뚫린 것을 보고 재훈이에게 물었다.


"재훈아, 컵라면 비닐 어떻게 뜯었어?"

"연필로 구멍 뚫어서 뜯었어요. 저 컵라면 못 먹어요?"


 재훈이의 대답을 듣고 담임 선생님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용케 준비를 했더라니. 재훈이는 친구들이 연필로 컵라면 비닐에 구멍을 내서 뜯는 것을 보고 따라 했는데, 힘을 너무 줘서 컵라면 바닥까지 뚫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재훈이는 '컵라면 못 먹어요?'라며 빈 컵라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겨우 웃음을 참고 재훈이를 다독였다.


"괜찮아 재훈아. 잘했어. 선생님 컵라면 줄테니까 다시 해보자."


 재훈이는 선생님의 컵라면으로 다시 비닐을 뜯어 컵라면을 준비했고,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


 특수교육대상학생 중 재훈이처럼 조용한 아이들은 학급을 운영하는 데 있어 편한 아이일 수 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고, 조용하고, 게다가 주변 아이들이 잘 도와주기까지 하니 교사가 나서서 도와줄 일이 없다. 하지만 편한만큼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눈에 띄지 않으면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재훈이도 조용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교생활을 했던 것 같다.

 재훈이는 1년 동안 수많은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면서 눈에 띄게 달라졌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고, 도움이 필요할 때는 즉시 도움을 요청한다. 재훈이는 이제 스스로 뚜껑을 열어 음료수를 마신다. 과자도 먹고 싶을 때 스스로 뜯어먹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누군가 대신해주려 할 때 재훈이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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