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품 앞에 30분을 써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박물관이 나에게 남긴 적 없는 것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박물관에서 감동받은 기억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유럽 여행에서 오르세 미술관, 시스티나 성당 등을 방문했다. 세계적인 걸작들 앞에 섰지만 남은 감상은 '웅장하다', '작가가 이걸 다 손으로 했다니 대단하다' 정도였다. 물론 어린 나이였으니 깊은 감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20살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전날인 4월 4일, 학과 친구들과 뮤지엄산에 다녀왔다. 단체 관람이었고 솔직히 인상 깊은 것은 없었다. 안도 다다오가 현지의 돌로 설계한 건축은 인상적이었지만, 전시 내용 자체는 검색으로도 얻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종이박물관은 원주한지테마파크에서 이미 비슷한 전시를 본 적이 있었다. 현대미술 작품들 앞에서는 경외감보다는 묘한 심술이 먼저 난다. 혁명적인 건 알겠는데, 아이디어 하나로 성립하는 작품 앞에서 경탄이 나오지 않았다. 웅장한 것 앞에서는 노고에 대한 존경, 가벼운 것 앞에서는 심술. 매번 거기서 멈추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식을 바꿔보기로 했다. 서양미술사 과제로 형식 분석 스케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것을 단순한 숙제가 아니라 실험으로 쓰기로 했다. 다양한 작품을 돌아보는 대신, 하나를 길고 자세히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는지.
3층 구석, 석관 하나 앞에서 30분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 전시관 3층, 구석에 놓인 석관 부조 하나를 골랐다.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형태가 입체적이라 쓸 내용이 풍부해 보였다. 노트를 꺼내고 연필을 잡았다.
처음 5분은 전체 구도를 잡는 데 썼다. 수평으로 긴 직사각형 프레임 안에 인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는데, 눈으로 볼 때는 그냥 '복잡한 부조'였던 것이 선을 따라 그리기 시작하자 하나씩 분해되기 시작했다. 중앙의 원판을 중심으로 좌우가 거의 대칭이라는 것, 인물들의 비례가 성인이 아닌 유아에 가깝다는 것, 상단의 날개 달린 인물들과 하단의 엎드린 스핑크스 형상이 완전히 다른 동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 눈으로만 봤을 때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연필 끝에서 드러났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림에 빠져들수록 주변이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어왔다는 점이다. 커플들이 소곤거리며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내 어깨너머로 스케치를 힐끗 보는 기척. 솔직히 좀 쪽팔렸다. 박물관 한구석에서 나 혼자 연필 들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별로 유명해 보이지도 않은 작품에 매달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내 집중을 존중해 주었다. 내가 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면 일부러 뒤쪽으로 돌아가주거나 빠르게 지나가주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 배려가 고마웠고, 동시에 내가 이 작품 앞에서 시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변에 전달되고 있구나 싶었다. 감각이 집중되면서도 극대화되는 모순적인 경험은 꽤 오랜만에 느껴본 것 같다.
30분이 지나고 스케치를 마쳤을 때, 나는 이 석관 부조에 대해 설명문을 읽지 않고도 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고부조가 깊게 파여 있어서 조명에 따라 그림자가 달라지는 것, 원판이 얼마나 돌출되어 있는지, 인물의 피부는 매끄럽게 연마되어 있는데 배경은 의도적으로 거칠게 남겨둔 것. 눈으로 훑었을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연필로 따라 그리면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본 나머지
스케치를 마친 뒤 상설전시관을 돌았다. 사유의 방, 청자·백자실, 경천사 십 층 석탑. 유명한 것들을 다 봤다.
작품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청자·백자실의 작품들은 서양 조각에 꿀리지 않는 정교함을 보여주었고, 국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몇 초 보고 스쳐 지나가면 기억에 남기가 물리적으로 어렵다. 석관 부조 앞에서 30분을 쓴 직후였기에 이 차이가 유달리 선명하게 와닿았다.
특히 사유의 방은 아쉬웠다. 콘셉트 자체는 이해한다. 반가사유상의 사유(思惟)에 맞춰 공간을 어둡게 연출한 것, 그 의도는 좋다. 그런데 어두우니까 디테일이 안 보이고, 2미터 가까이 떨어져야 하니 가까이 가서 볼 수도 없다. 내가 있는 동안 누군가 사진을 찍으려다 플래시가 터졌는데, 경비원이 거의 호통에 가깝게 주의를 주는 장면을 봤다. 당연히 플래시는 안 되지만, 그 장면을 보면서, 이 공간이 관람자에게 허용하고 있는 것은 결국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지 ‘작품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의 방은 풀지 못한 딜레마였다.
신기하게도, 거의 같은 구조의 기억이 하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몇 초 보고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루브르에서 작품을 감상했다는 기억은 그것뿐이다. 수천 점의 걸작을 지나쳤을 텐데, 남은 건 불평하면서라도 시간을 쓴 그 한 점뿐이라는 사실이 오늘의 경험과 정확히 겹쳤다. 아마도 작품 자체보다 그 공간에서 보낸 시간과 몸의 경험이 기억을 만드는 것 같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동안 박물관에 갈 때마다 같은 방식으로 소비해 왔다. 유명한 것들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일종의 경험으로 간주하고, 정작 그것이 왜 가치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 오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석관 앞 30분이 그 습관의 민낯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博이 아니라 薄
博物館. 넓을 박(博)에 물건 물(物), 집 관(館). 다양한 물건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에 충실하려 한다. 더 많은 전시실을 돌고, 더 많은 전시물을 확인하고, 더 많은 해설을 읽으며, 박물관을 '제대로' 감상했다고 믿는다. 나 역시 그래왔다. 유럽에서도, 뮤지엄산에서도, 오늘 상설전시관에서도.
그런데 오늘의 경험은 정반대였다. 넓게(博) 본 감상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얇게 하나만 파고든(薄) 감상만이 기억에 각인되었다. 스케치하는 동안 나는 작품을 ‘소비’ 한 것이 아니라 작품과 ‘대면’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면의 조건은 뜻밖에도 단순했다. 시간, 그리고 집중.
돌이켜 보면, 석관 앞 30분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던 자리가 어느 순간부터 편해졌고, 남은 건 석관의 선과 나 사이의 거리뿐이었다. 30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지 모른다. 돌아보면 그 시간 동안 잡념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몰입이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를 전부 차지해 버린 느낌이었다.
박물관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러 왔다. 답은 있었다. 다만 그 답은 博物館이 아니라, 薄物觀(얇을 박, 물건 물, 볼 관)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