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중에서도 '룸 서울'
여기 두 개의 이야기가 있다. 배경은 서울, 무대는 '빅룸'과 '스몰룸'으로 나뉜다. 2월 27일까지 세종 S시어터에서 공연하는 The Helmet(더 헬멧)-vol.1의 룸서울이 이 이야기의 베이스로, 지금 쓸 글은 영화 <에이리언 2>와 시고니 위버에 대한 얘기다. 연극 얘기를 하면서 갑자기 무슨 영화냐고? 룸 서울에서 <에이리언 2>는 아주 중요한 소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글에는 연극 더 헬멧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연극 <더 헬멧> 룸 서울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직 극을 보기 전인 분들은 열람하지 않기를 권합니다.
▶Room Big : 에이리언 2*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만든 이 전지구적으로 유명한 외계생물체 시리즈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오리지널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에이리언 4>가 개봉한 지 벌써 20년, 아니 올해로 21년이 지났지만(쓰면서도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이다) 리부트 시리즈인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가 최근 개봉했기 때문에 꽤 징그럽고 흉물스러운 이 외계생물체에 대해선 모두들 너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적어도 룸 알레포의 메인 키워드인 시리아 축구보다는 에이리언이 더 친숙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리언 2>에 대해 굳이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 영화와 룸 서울이 갖는 대칭적인 유사성 때문이다. 헬멧을 보고 난 뒤 지이선 작가에게 가장 감탄한 건 각각의 배경과 공간에서 메인 키워드로 삼은 소재들을 극 전체에 훌륭하게 녹여내는 방식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최루탄과 몰로토프 칵테일이 대학가 하늘을 날아다니던 그 시기와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대학생들이 시위대를 꾸려 거리로 나왔던 그 시기 사이에 주어진 간극, 그리고 주인공의 성장과 반동인물의 변화를 에둘러 묘사하는 소도구로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를 선택한 그 대담함이 경이로웠다. 백골단의 추격을 피해 좁은 곳으로 숨어드는 주인공과 생존자들, 어둡고 퀴퀴한 지하의 밀폐공간. 에이리언의 추격을 피해 비좁은 환풍구에 숨어 탈출을 노리는 리플리와 생존자들, 폐허가 된 개척지와 드롭쉽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에일리언. 쫓는 자와 숨는 자, 쫓기는 공간과 쫓아가는 공간들. 전혀 다른 이유, 전혀 다른 사건, 전혀 다른 존재들은 이렇게 교차한다.
▶Room Small : 시고니 위버, 혹은 엘런 리플리
헐리웃을 필두로 전세계 영화계를 돌아봐도 리플리는 단연 독보적인 여성 전사 캐릭터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사라 코너와는 좀 다른, 파이터보다는 리더에 가까운 전사. 수많은 영화 속에서 무수히 등장했던 남성 전사 캐릭터 사이에서 <에이리언> 시리즈의 시고니 위버=엘런 리플리가 갖는 위치는 아주 특수하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제작자 워터 힐, 그리고 데이빗 길러가-무려 베로니카 카트라이트를 째고-시고니 위버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진짜 이유가 과연 남성 중심의 SF 서사를 뒤집기 위해서였는지, <스타워즈>를 뭉개버릴 SF영화를 만들라는 20세기 폭스의 요구에 따라 여러 가지로 고심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든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주인공은 엘런 리플리고 시고니 위버다.
주인공이 시고니, 그러니까 리플리라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는 그 때 그 시절 '페미니즘'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우습고 씁쓸한 일이다. 여자가 무기력하게 괴물에게 희생당하거나 자극적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 나가서 남자 주인공의 '각성'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까 냉장고 속의 여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에이리언>이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되기도 한다는 점이 말이다. 뭐, 사실 굳이 영화만의 얘기는 아니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외치겠다고 찾아온, 운동하겠다고 제 발로 찾아와 최전선의 전투조에 몸을 던진 헬멧B=시고니에게 헬멧E=선배는 뭐라고 했던가. "너희 학교 학생회장 얼굴 보고 들어왔냐"고 하지 않았던가. 언제나 여성들의 용기는 이런 식으로 쉽게 매도되곤 한다. 그러니 여성들의 일상이 매 순간 페미니즘이 아닐 수 있겠는가.
▶Room Big : 에이리언 2
스몰룸에 갇힌 헬멧 B=시고니와 헬멧 E=선배는 흡사 우주선 안에서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에이리언을 피해 환기구에 숨은 리플리와 동료들처럼 숨을 죽인다. 불투명한 벽 너머로 괴물의 안광과도 같은 플래쉬 불빛이 번쩍일 때마다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떤다. 나라면 정말 아무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할 것 같은데 두 사람은 극화적 작법에 충실하게 애기를 나눈다. 그리고 벽 너머 빅룸에선 두려움에 떨 필요 없는 두 마리의 에이리언이 얘기를 나눈다. 그들 사이에는 서점 주인인 헬멧 C가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헬멧 C는 그들과 '대화'를 하지 못한다. 헬멧 C의 정신은 스몰룸 안에, 몸은 빅룸 안에 있으며 빅룸의 두 마리 에이리언, 그러니까 백골단들은 애초에 서점 주인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에이리언이 왜 인간을 사냥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인간에게 없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에이리언이 무슨 이유를 갖고 있더라도 사냥당하는 인간은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섭식, 포식, 유흥, 번식. 생명체로서 지극히 당연한 욕망을 거리낌 없이 발산하며 에이리언은 인간을 사냥한다. 인간이 혐오, 위생, 미관, 기분 따위의 이유로 종이 다른 바퀴벌레를 거리낌 없이 죽이듯이. 백골단이 명령, 진급, 휴가, 분노 따위의 이유로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대학생들을 발로 차고 곤봉으로 두들겨패고 헬멧으로 대가리를 깨듯이. 죽고 죽이고, 때리고 찢고 부수고 망가뜨리고, 추격하고 잡아가고 고문하고 살해하는 그 모든 행위들 뒤에는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서로의 욕망 그리고 각자의 선이 있다. 무협지의 악역이나 읊을 법한 대사지만 이기는 쪽이 옳은 세상, 그게 바로 우주선 안에서 대치하는 에이리언과 인간들, 그리고 서점 지하에서 벽 하나를 두고 대치하는 1987년 백골단과 학생들이 처해있는 현실이었다.
▶Room Small : 시고니 위버, 혹은 엘런 리플리
사실 그렇다. 광활한 우주, 정체모를 괴물에 맞서 싸우는 이가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떻겠는가.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괴물 앞에서 인간은 그저 인간일 뿐이다. 턱 끝까지 닥쳐온 죽음의 공포 앞에 그저 한 인간으로 존재해본 적이 없고, 그런 공포를 상상하고 그 공포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자들이나 시고니=리플리의 '여성성'에 딴지를 건다. <에이리언 2> 여주인공의 '못생김'을 얘기하고 '막판에 옷을 벗는' 장면에 대해서나 낄낄거릴 줄 아는 백골단 대장처럼. 여자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덩어리로 생각하는 그 무지함은 영화 포스터에 뚫린 엿보기 구멍으로 보이는 시고니의 눈을 발견한 순간에도 드러난다. 백골단 대장은 시고니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인공이 외국인인데 눈색깔이 까맣네?"라고 이죽인다. 하지만 원래 시고니 위버의 눈동자 색은 짙은 브라운이다.
서점 지하에 붙어있는 <에이리언 2> 포스터를 보고 스몰룸과 빅룸에서는 전혀 다른 감상이 흐른다. 시고니는 리플리의 대단함을 얘기하고 백골단 대장은 리플리의 못생김을 얘기한다. 어디 여자가, 정도의 함축할 수 있는 백골단 대장의 조롱은 가벼운 복선으로 기능한다.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이 현관문과 포치 앞 계단에 물을 부어 얼려놓는 것 정도의 가벼운 복선. 그러나 결과를 대충은 가늠케 하는. '숨은' 사람을 '찾아내게' 하기 위한 장치이자 '안'의 사람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필연적으로 기능해야 할 장치도 시고니와 백골단 단장 사이에서 터진다. 영화를 조롱하고 리플리를 비웃는 백골단 대장의 말에 분을 참지 못한 시고니가 벽을 쾅하고 쳤을 때 객석은 소리없는 탄식으로 뒤덮인다. 물론, 시고니가 벽을 때리지 않았어도 백골단은 참을성 있게 그들을 사냥했을 테지만 말이다.
▶Room Big : 에이리언 2
희생과 구원은 대부분의 영웅 서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다. 희생과 구원은 전혀 별개의 독립적인 사건으로 구성될 때도 있고 서로간의 짝패로 어우러질 때도 있다. 룸 서울을 영웅 서사라고 표현하는 건 일종의 부채감을 낳지만, 그래도 시고니는 선배의 희생으로 성장한 영웅이고 그 덕분에 빨간 삼각건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에이리언>의 리플리가 괴물에게 사냥당한 동료들의 희생 속에 생존을 위해 분투하며 영웅으로 각성하듯, 그리고 <에이리언 2>에서 뉴트의 구원자가 되어주듯이.
극 중 설명처럼 <에이리언>은 <에이리언 2>보다 국내에서 늦게 개봉했다. 민주화 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기 전, 1986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봉한 <에이리언 2>가 흥행에 성공하자 배급사에서 부랴부랴 1편을 수입해서 개봉한 게 그 다음해 10월 1일이다. "내는 꼭 여기서 나가서 에이리언 1편을 보고 말 낍니다" 그렇게 이를 악물던 시고니나 "꼭 살아서 나가가지고 에이리언 1편 보는기다, 약속하는기다" 그렇게 다짐하고 뛰쳐나가던 선배 모두 <에이리언> 1편이 채 반년도 안 돼 개봉할 줄은 몰랐을 거다. 선배가 군화발과 곤봉에 맞아 피가 터지고 남영동에 끌려가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재우는 고문을 당하고 몽롱해지는 의식 사이로 최루탄 냄새를 맡는 그 사이 시간은 흐르고 <에이리언> 1편이 개봉하고 6월 항쟁은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쳤던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꽃을 피웠다. 그리고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Room Small : 시고니 위버, 혹은 엘런 리플리
1편에서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한 끝에 에이리언에게서 도망친 리플리는 57년 동안 동면 상태에 빠져있다가 간신히 구조된다. 그러나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바뀐 것은 없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한 마리였던 에이리언은 테라포밍한 개척지를 집어삼키는 떼거리가 되어 리플리를 기다리고 있다. 물론 리플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었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끔찍한 경험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던 리플리는 결국 개척지를 향한다. 자신이 받은 상처와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인 적을 '쓸어버리기 위해'.
4년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스몰룸에 갇히게 된 시고니 선배 역시 마찬가지다. 무사히 도망쳐 살아남은 시고니 선배는 리플리처럼 다시 백골단에게 돌아온다. '쓸어버리기 위해'. 자신을 괴롭혀 온 기억들과 싸우고,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시고니 선배가 다시 돌아온 것 역시 적들과 싸우기 위해서다. 빅룸의 에이리언'들'과, 그리고 스몰룸의 '빨간 삼각건', 퀸 에이리언과 같은 존재인 '프랑크 시나트라'를 쓸어버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토록 잡으려 쫓아다녔던 '빨간 삼각건'은 사실 <에이리언 2>의 뉴트와 같은 존재다. 결국은 시고니 선배가 '구해줘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타준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화가 나더라" 시고니 선배의 그 한 마디가 '빨간 삼각건'을 향할 때 빅룸에서 프랑크 시나트리=백골단 대장이 말한다. "최동원!" 프락치가 나오면 커피 타달라고 해라, 걔가 커피를 기가 막히게 타. 여경을 프락치로 삼을 생각을 하다니 캬, 난 역시 기가 막혀. 이용당하는 도구, 하지만 이용당하는 걸 알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삶은 그러고 보니 <에이리언 4>의 콜과도 닮았다.
▶그리고 룸 서울
<에이리언> 시리즈를 통해 주인공 리플리는 점점 에이리언에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인다. <에이리언 3>에서는 퀸 에이리언의 체스터 버스터를 품은 탓에 자살하기도 하고, <에이리언 4>에서는 클론으로 부활하며 에이리언의 유전자가 섞여 일종의 동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일방적인 영향이란 건 없는 만큼, 퀸 에이리언도 리플리의 유전자가 섞여 흡사 인간처럼 자궁으로 출산하는 모습도 나온다-심지어 그렇게 태어난 뉴본 에이리언이 싸가지 없이 어미를 살해하는 것 역시 모친 살해의 신화와 똑 닮았다-.
괴물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된다. 리플리가 에이리언과 동화된 것처럼 "분명히 이 방을 나갔는데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다"는 분노를 품고 백골단을 두들겨 패며 4년을 달려온 시고니 선배는 '미친 개'가 됐다. 시고니 선배가 '미친 개'가 되는 사이, 에이리언이 리플리와 동화된 것처럼 백골단의 신참들은 백골단에 들어왔다고 말을 못해서 철원으로 부대배치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
룸 서울의 도입부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몰로토프 칵테일을 제조하느라 깡소주를 마셔대던 신입생들이 나누는 얘기가 떠오른다. 백골단의 무서움, 전투조의 대단함을 얘기하던 그들은 시무룩한 소리로 말한다. "걔네도 애들, 우리도 애들." "맞고 짓밟히는 순간에도 걔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걔들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의 이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로의 선을 위해 쫓고 쫓기던 시고니 선배와 프랑크 시나트라가 마지막 펼치는 격투씬은 그래서 차라리 희망적이다. 살아남는 자가 선, 이기는 쪽이 옳은 것. 하지만 설령 시고니 선배가 패했다고 하더라도 시대의 선은 프랑크 시나트라를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종철부터 강경대까지, 죽은 자들의 피가 결국 산 자를 이겨내고 세상의 선을 움직였듯이 말이다.
"내는 반드시 학교로 돌아갈 끼다!"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겠다던 리플리의 다짐처럼 시고니 선배는 그렇게 외치고 룸 서울에서 달려나간다. 나는 리플리와 시고니 선배의 결말이 다르길 바란다. 리플리가 돌아온 지구는 이미 폐허였지만 시고니 선배가 달려나간 서울은 그때보다 더 나아졌다고 믿는다. 피와 투쟁으로 쌓아올린 서울에서, 시고니 선배가 리플리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에이리언 2>의 원제는 <에이리언즈(Aliens)>다. 단 한 마리만 출연했던 1편과 달리 에이리언, 그러니까 제노모프가 여러 마리 등장한다는 뜻에서 복수형 제목이 붙었다. '백골단'의 단(團) 역시 단체, 집단을 의미하는 복수형이다.
**냉장고 속의 여자 : 만화나 영화 등의 매체에서 남성 캐릭터의 각성과 동기를 위해 살해당하거나, 강간당하거나, 부상당하는 여성 캐릭터를 말한다. DC코믹스의 <그린랜턴> #54 이슈에서, 그린랜턴인 카일 레이너가 빌런에 의해 토막살해당한 채 냉장고 안에서 발견된 여자친구 알렉스를 보고 히어로로 각성하는 장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