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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데리온 May 16. 2023

오묘한 경험

1.

그날은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 무엇을 했는지, 낮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열 시, 열한 시 쯤이었을까요. 얇은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운동화를 대충 꾸겨신은 채로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갔습니다. 한 손에는 꽤 큰 쓰레기봉투가 들려 있었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에도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켜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짧은 무료함도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밖으로 나와서 바로 앞에 있는 쓰레기 수거함에 봉투를 휙 던져 넣었는데, 날씨가 참 선선하고 좋았습니다. 낮에는 약간 더운 느낌이었는데 밤이 되니 시원한 바람이 훅 불어왔습니다. 그래서 한 바퀴 돌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중앙에 있는 주차구역들을 한 바퀴 도는 데에 1~2분쯤 걸립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아파트 단지들이 죽 늘어서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열 동 쯤 되는 아파트들이 제가 서 있는 단지 중앙을 바라보고 늘어서 있습니다. 창문들을 슥 훑어보니 몇몇 집은 불이 꺼져 있고, 몇몇 집에는 옅은 조명이, 몇 집은 아직 환하게 불이 밝혀 있습니다. 


'대체 몇 명이 이 조그만 단지 안에 사는 걸까'


문득 그게 궁금해집니다. 백 명? 더 될 것 같은데. 이백 명? 삼백 명? 커튼으로, 창문으로 가려져 있어서 보이지 않던 그 속의 사람들을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이 조그만 동네 안에서 몇백 명의 사람들이 숨쉬고 살고 있다. 지금 손가락 하나로 가려지는 저 창문 안에 사람들이 있다. 부부 둘이서 사는 집도 있고, 아버지나 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집도 있고, 우리 집처럼 자식 한두 명과 부모가 함께 사는 집도 있다. 그리고 이 빽빽히 늘어선 창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스스로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다. 저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문제, 각자의 기쁨, 각자의 슬픔, 각자의 고통, 각자의 고민, 각자의 열정, 각자의 꿈, 각자의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구나'



2.

그날은 평범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 속을 걸어야만 했으니까요. 자꾸 툭툭 부딪히는 사람들의 어깨와 깔깔대는 웃음들까지 모두 괜히 짜증날 만큼 북적대는 거리였습니다. 영혼 없이 걷다가 문득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3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백 명 정도가 옆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날 들었던 생각이 비슷하게 떠오릅니다. 이 사람들 모두가 그런 삶을 살고 있겠구만. 친구와 둘이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건지 하하 웃으면서 걸어가는 저 사람도, 에어팟을 꽂고 심드렁하게 걸어가는 저 사람도, 옷을 화려하게 입은 이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면서 쭈그려 앉아 담배 한 대 피우고 있는 저 사람도. 


모두에게 기쁜 환희의 순간이 있었고, 지우고 싶은 과거도 있고, 너무나 사랑하는 이가 있고.

아직 풀리지 않은(자신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심각한) 문제가 턱하니 마음을 짓누르고 있고, 저녁을 너무 많이 먹은 게 후회되고, 내일은 뭘 할지 생각하고, 가끔 삶에 대해 고민하고.



3.

나는 주인공일까요 엑스트라일까요. 제가 지금까지 엑스트라처럼 여겨왔던 사람들 - 놀라울 만큼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던 모든 스쳐 지나간 사람들 - 모두 주인공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은 지금도 이것을 떠올리면 오묘한 감정이 듭니다. 오묘한 - 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이유를 댈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저와 같은 주인공들이 고작 반경 몇십 미터 안에서 함께 잠에 듭니다.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문제와 야심을 안고 따닥따닥 붙어 살아갑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참 놀랍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야겠다, 다른 연극의 주인공들을 조금 더 존중해 주어야겠다는 생각 따위를 품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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