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시작 부분에서 들리는 "Suddenly I see". 이 노래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영감이나 본인만의 기준은 어느 한 순간에 도둑처럼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초반부에 주인공 앤디(앤 해서웨이)는 표정없이 높기만 한 건물들에 압도당한다. 비록 실체는 없을지라도 너무나 강력해 보이는 힘 앞에서 앤디는 한없이 작고 초라해 보인다. 그런 그녀가 이 거대한 시스템의 중심부로 들어온다. 그것도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매우 시니컬해 패션계의 마녀라는 별명을 가진 미란다의 비서로.
앤디는 미란다의 안하무인한 태도와 온갖 '갑질'을 겪는다. 심부름과 잡일은 기본, 해리 포터의 미출판 원고를 네 시간 안에 구해다 달라는 도저히 수행 불가능한 부탁들까지. 이리저리 정신없이 걷고 뛰며 말 그대로 간신히 하루를 살아내는 앤디에게 돌아오는 칭찬의 한 마디조차 없다. 오히려 아주 사소한 실수에 모욕적인 말을 쏟아낸다. 미란다 특유의 무표정하고 "너 따위는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 하는 투로 말이다. 성격 나쁜 보스에게 고통받는 앤디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편집했고 또 열정적이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완벽히 표현해낸 앤 해서웨이의 연기 덕에, 이 영화는 일(커리어)의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나가는 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영화는 선택에 대한 영화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고 또 균형을 잡아 보려 애쓰는 두 가지가 바로 일과, 일 외의 것들이다. 사회적인 의미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1. 일은, 성공에 대한 야망을 대변한다. 돈, 명품, 업계의 탑 클래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일반 사람들은 만나기 힘든 연예인들과 유명 인사들을 뒤풀이 파티에서 만나는 것, 본인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것, 잡지에 실릴 인터뷰이가 되어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에 대해 마음껏 뽐내보는 것.
2. 반대로 일 외의 것들 (이것을 정확히 표현할 만한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일상의 행복, 주변인과의 관계, 일 외적인 것들 등 뭐라고 불러도 된다.) - 일 외의 것들은 주로 타인과의 관계에 있다. 오래된 친구와의 약속, 사랑하는 연인의 생일 축하 파티, 배우자와의 관계, 아이와의 관계, 오후 두 시 쯤 한가하게 공원을 산책하는 것.
우리는 이 두 가지 기둥을 마음 속에 세워 두고, 그 사이에서 자신이 어떤 것을 더욱 중요시하는지 평생 고민하며 살아간다. 시간과 에너지는 절대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에,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한 쪽은 내려가게 된다. 중요시하는 것들이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바뀌기도 한다.
미란다는 전형적으로 일을 선택한 사람이다. 앤디가 처음 미란다의 집에 방문한 날, 층계 위에서 앤디가 우연히 본 것은 남편과 언쟁을 벌이는 미란다의 모습이었다. 또 파리의 출장에서 저녁 식사를 위해 테이블을 배치할 때, 남편과의 이혼을 암시하는 장면도 있었다. 배우자와의 관계 대신 일을 선택한 것이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걸어가는 대신, 1포인부터 3포인트, 절반 지점, 결승 지점에 누구보다 빠르게 도달하는 데에 거의 온 힘을 썼던 것이다. 앤디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는다. 오래된 친구들에게 변했다는 불평을 듣고, 남자친구(네이트)의 생일도 축하해주지 못한다. 파리에 가는 것을 목숨처럼 여기고 기대했던 동료 에밀리를 본의 아니게 밀어내고 대신 행사에 참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앤디가 천성적으로 일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 때문에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 앤디는 매우 갈등했고 또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부던히 노력한다.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도 남자친구의 생일 파티에 늦어서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나, 본인 때문에 기회를 놓친 동료 에밀리에게 사과하는 모습들에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앤디가 일 외의 것들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란다 역시 천성적으로 차갑고 냉혹한 사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단지 몇 번의 갈림길에서 일을 선택하다 보니 어느새 그 외의 것들을 차츰 잃어가는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출발점에서 훌쩍 멀어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앤디는 미란다와 다른 선택을 한다. 미란다가 앤디에게서 젊은 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한 후에, 성공을 위해서는 주변인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을 듣고 앤디는 결심한다.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미란다의 전화를 무시하고 대답 대신 핸드폰을 분수대에 던져 버린다. 아깝다.
커리어가 아닌 나머지 하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글 쓰는 일을 위해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옷도 예전처럼 촌스러워지고 (사실 진짜로 촌스러워지진 않았다.) 다시금 여유로워진 앤디는 차에 타려는 미란다를 먼 발치에서 우연히 바라보게 된다. 미란다 역시 앤디를 발견하고, 앤디를 잠시 바라보다 차에 탄다. 그리고 밖에선 볼 수 없는 차 안에서 앤디를 바라보며 영화 내내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하지 않았던 선택, 자신이 가지 않았던 길을 걸어갈 앤디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 어쩌면, 만약 자신이 젊은 시절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을지 모른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어물쩍거리는 운전 기사에게 "안 가?" 라고 내뱉으며 원래의 미란다로 돌아온다. 그녀는 여전히 멋지다는 말로 부족한 런웨이의 미란다로 살아갈 것이다.
당신은 어느 쪽에 무게를 두고 살아갈 것인가?
만약 한 쪽을 어렵게 선택했다면, 대체 얼마 만큼 무게를 두어야 할까?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한 쪽을 아예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무얼 선택하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미란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던 앤디의 미소도, 또 그 앤디를 보고 여유롭게 웃던 미란다의 미소도 너무나 멋지고 쿨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