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월요일, 몬트리올 시내
보리언니는 오늘 새벽에 한국행 비행기를 타러 떠났다. 평일이라 일을 해야 하는 현지를 뒤로 하고 일단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하하호호 즐거웠지만, 혼자 남으니 해방감이 느껴졌다. 비효율적인 짓만 하며 하루를 멋대로 보내도 된다는 신남에 지도도 제대로 안 보고 일단 공공 자전거 빅시BIXI에 올라탔다. 그 동안 여러 명이서 한눈 팔지 않고 늘 목적지를 향해 직진 했는데, 혼자 자전거를 타고 마구잡이로 돌아 다녀도 된다 생각하니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인의 피를 버리지 못해 이미 목적지는 정해 둔 상태였지만.
몬트리올만의 특색 있는 투어를 원한다면 근대에 지어진 건축물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을 며칠 만에 파악해 둔 터였다. 현지에게 크루 빌딩처럼 건축 투어를 할만한 스팟을 추천해 달라고 하니 국가 기록 도서관(Bibliothèque et Archives nationales du Québec)에 찍어 놓은 구글 맵 별표를 보여주었다. 내 구글맵에도 주소를 입력하고 출발 했는데 자전거에 휴대폰을 거치할 수가 없어 한 두 블럭 정도씩 랜드마크를 확인한 후 자전거를 멈추고 맞게 가고 있는지 앱을 확인해야 했다. 잔뜩 흐린 회색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몬트리올 사람들은 거의 우산을 쓰지 않았다. 쏟아질 경우를 대비해 가방에 우산을 넣어오긴 했지만 나도 우산을 펴지 않고 깨알 같은 빗방울들을 얼굴에 맞으며 자전거를 탔다. 국가 기록 도서관 앞 광장 쪽에 자전거를 도킹하고 건물에 입장했다. 도서관 내부에 들어가려면 신분증을 맡기고 락커에 소지품을 넣어야 했는데, 본격적인 도서관이구나 싶어 입장을 잠깐 망설였다가 남는 게 시간인데 그냥 들어갔다가 영 아니면 바로 나오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리셉션에 여권을 맡겼다.
열람실로 들어가는 로비에 있는 커다란 그리스 여신상과 구석구석 보이는 아르누보 장식을 구경했다. 아르누보 양식의 고풍스러움에 감탄하며 층층이 열람실 내부를 돌아 보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좁았고 장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 디지털라이즈 되어 컴퓨터에서 찾아봐야 하는 모양이다. 몬트리올 시민들도 자료를 찾으러 온 사람들보다는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러 온 사람들이 더 많아 보였다. 건물 구경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서 장서들 사이를 천천히 걷다가 가지런히 꽂혀 있는 백과사전 시리즈의 책 등에 쓰인 제목을 읽어보았다. 1800년대 뉴욕 주 인구조사 편람, 퀘벡 주 가문 족보(family tree) 같은 제목이 눈에 띄었다. 한 권씩 뽑아들고 종이를 넘겨보니 서양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19세기 흑백 가족 사진들이 실려 있었다. 누군지 모를 백인들의 조상이 소유했던 캐나다의 부동산 이야기와 두 세기 전의 기록이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보존이 가능한 평온한 국가의 편람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세계 대전 때 전범국의 식민지였고 아직도 그 적폐를 청산하지 못해 정당정치로 싸우는 국가 국민으로서, ‘역시 1세계 녀석들이 정치외교에 대해 뭘 알겠냐'라는 냉소를 던지고 도서관을 나왔다.
도서관 맞은 편에는 호그와트처럼 생긴 건물이 있었다. 구글맵에서 찾아보니 라이트스피드Lightspeed라는 이름의 클라우드 회사였다. IT 회사 사무실인데 방문자 평점이 너무 낮은 것이 웃겨서 유저 리뷰를 펼쳐보니, 라이트스피드의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악평이 도배 돼 있었다. 장애가 잦고 CS 대응이 없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건물을 구경하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 보니, 외관만큼 멋들어진 사무실 인테리어와 평온한 표정으로 일하는 직원들이 보였다. 여전히 재택근무를 많이 하는지 자리들이 많이 비어 있었다. 고객 평가야 어쨌든 직원 만족도는 높은 회사 같았다.
저녁에는 IGA 테니스 스타디움에서 현지의 친구와 함께 몬트리올 뱅크 오픈의 예선전 경기를 보기로 했다. IGA 스타디움 가는 길에 있는 장탈롱 마켓(Jean Talon Market)을 구경하고 간식을 먹은 뒤 일행들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오후에 도착하니 시장의 많은 가게들이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맛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식자재를 신나게 쇼핑하면 결국 대부분 냉장고를 경유해 쓰레기통으로 향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아무것도 사지 않고 열려 있는 가게들의 농수산물, 음식들을 눈에만 담았다. 편하게 시간을 떼우려고 마켓 앞에 있는 팀 홀튼으로 향했다. 맛있는 도넛과 맛없는 커피를 먹으며 발바닥에게 휴식 시간을 준 뒤, IGA 스타디움으로 출발했다.
같이 경기를 보기로 한 친구는 현지가 링글에서 만난 영어 선생님인데 맥길 대학에 다니는 똘똘하고 귀여운 20대였다. 링글에서 선생님으로 매칭됐을 때는 나탈리였는데 지금은 찰리고, 지칭대명사는 they, them을 쓴다고 했다. 경기장 바깥에서 찰리와 만나 요기를 하려고 간식 부스를 구경했는데 비건인 그가 고를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았다. 자기 가방에서 비건 프로틴바를 꺼내 이걸 먹으면 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너무나 아기 같았는데 키가 180cm 정도여서 나는 혼자 속으로 ‘완전 자이언트 베이비네'라고 생각했다. 자이언트 베이비 옆에 고목나무 매미처럼 붙어 서서 입장을 기다리다 전광판을 보니, 누가 나오는지도 모르고 그냥 예매한 이 경기의 출전 선수가 비너스 윌리엄스였다. 우리는 뜻밖의 행운에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경기장에 입장했다.
비가 내리고 날이 흐려 미친듯이 추웠다. 반바지 밖으로 나온 두 다리가 얼어붙을 것 같아 쉼없이 손으로 비비며 계속 서브미스를 하는 비너스 윌리엄스를 바라보았다.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로 무수한 듀스가 이어졌다. 너무 추워서 종국에는 아무나 이기고 빨리 끝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지경이었다. 추위와 결론이 나지 않는 듀스의 연옥으로 관객들이 지쳐 있는 것을 느낀 어떤 아저씨가 우리의 반대편에서 일어나 응원단장처럼 파도타기를 시도하는게 보였다. 한 두 번의 시도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자 관객석에서 웃음과 함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고, 이 소리에 주의가 끌린 사람들이 상황 파악을 하고 결국 한 마음이 되어 다같이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자기가 시작한 파도타기가 몇 번이고 관객석을 돌며 이어지자 친구와 기뻐서 날뛰는 아저씨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소주 나발 부는 사람이 없는 것만 빼면 사직구장이나 여기나 다를게 없구나 생각했다.
결국 윌리엄스의 패배로 경기가 마무리 됐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샤워로 몸을 녹이고 감자칩과 맥주를 먹으며 현지와 <피식대학>을 보다 잠들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고 몇 주가 지나서야 빅시 자전거 앱에 카드결제가 매월 자동으로 연동이 돼 있다는 걸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있어도, 해외결제가 되는 내 신용카드는 9월 요금이 원활하게 빠져나가더라. 결제 문자를 받고서야 빅시 홈페이지에 들어가 구독을 해지하며 몬트리올의 공공 인프라 활성화에 기부했다 치자, 생각하려는데 서울의 지하철/버스 요금이 오른다는 뉴스가 나왔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