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
먼 옛날(?) 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전공 수업에서는 TV, 신문 등의 미디어가 형성하는 여론을 분석하기 위한 방법론의 일종으로 기호학과 담론이란 것을 배웠었다. 그 때는 담론의 구조를 분석하는 여러가지 학술적 이론을 배우고 미디어에 나오는 주제들에 적용해서 서술하는 시험 등을 보곤 했는데, 그냥 간단히 말하자면 담론이란 어떤 주제에 대한 여러 주체의 논의(대화) 양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가 대학생 때까지만 해도 미디어는 일방향적 전달이 우세했다. 틱톡 같은 것은 아예 없었고 페이스북도 컴퓨터로만 하던 시절이고, 싸이월드와 마이스페이스처럼 간편한 모듈로 만들어진 홈페이지 같은 것들이 인터넷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두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도구들이었지만 '개인 미디어'가 되기에 이 플랫폼들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들은 개인의 개성과 관심사를 한 자리에 모아서 보는 수준에 그쳤었다. 모든 소통은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거나 비슷한 종류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을 찾아 관심사를 나누고자 하는 등의 의미 위주였고, '셀카'라는 것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지만 흐릿하기 그지 없는 카메라 화질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목적이 없는 자기 표현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었다.
지금의 인터넷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아주 짧은 길이의 소통을 하고 길이가 짧다보니 의미 단위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는다(사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모르겠다). 서로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해 소통하는가? -바로 자기 표현만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모습을 몇 초 가량의 동영상 클립, AR 기술에 기반한 필터 등 여러가지 도구를 창조해 내고 누구든 볼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에 게시한다. 그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자아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좋아요'와 댓글 등을 받을 때 더더욱 실체가 확고한 자아상으로 자라난다.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들만이 온라인 상에서 자신의 자아를 만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과는 사뭇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이들도 온라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아를 만들고, 전시하고, 공유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밈이다. 그리고 개구리 페페는 이런 '루저'들의 자아를 먹고 자라난 상징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왓챠에서 직접 <밈 전쟁: 개구리 페페 구하기>를 시청하길 권한다)
밈은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짤방'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단순한 '짤방'보다는 원래의 영어 단어가 좀 더 광의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밈에는 의미가 없다. 밈은 유행어라고도 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유행어와도 좀 다르고, 짧은 모종의 텍스트가 포함 돼 있을 때도 있지만 아예 없기도 하다. 밈이 대표하는 이미지 자체에도 복잡한 함의는 들어있지 않다. 밈의 일차적인 목적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공통된 맥락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맥락에서 생겨난 이미지인지와는 상관없이 밈은 2차, 3차, N차로 유통되며 각각의 공유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바뀌거나 와전된 의미지로 소비될 수 있다. 개구리 페페의 탄생은 MTV 세대들이라면 익숙하디 익숙한 미국 만화 속 등장인물로서였다. 페페는 평범하게 바보 같은 미국 코메디 캐릭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인셀들과 인셀들의 입을 빌린 극우 미디어의 손을 거치며 페페는 혐오의 상징이 됐다. 페페의 일생(?)은 다큐멘터리 속에 더 자세히 나오지만, 어쨌든 한번 죽은 페페는 또다시 희안한 방식으로 여기저기서 부활하는데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거셌던 홍콩에서는 시위대의 마스코트로 자리잡기도 했다. 그 자체로서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고 사용하고자 하는 이들의 의도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의미를 가진 또 다른 미디엄이 된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렇게 난방향 미디어-밈의 시대를 사는 민중들은 자신들이 프로파간다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을 지녔다고 100% 확신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우파 스피커의 영상 하나를 봤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튜브에 그런 영상들이 추천된다는 점, 자기가 개구리 페페의 짤방을 본 기록이 온라인 상에 남아있기 때문에 거기서 파생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로 자신이 자동적으로 네비게이트 된다는 점을 무시하고 자신이 인터넷에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며 많은 텍스트(혹은 영상)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이 전적으로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바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에게 책임이 있는가? 노동계급에게는 각종 여론들을 다양하게 접하고 스스로 분석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사한 참고문헌을 가져와 비교하고 대조하며 무언가를 깨달아갈 비용(경제, 시간 모두)적 여유가 없다. 봉건시대의 농노들과 산업혁명 시기, 근대 노동계급은 이런 비용적 한계 때문에 정치/사회 담론에서 유리된 삶을 살았었다. 신문을 읽고 뉴스를 보긴 했지만 이 미디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다. 여론조사 기관이나 각각의 미디어들에서 따로 예산을 집행해 조사하지 않으면 대중의 여론은 공론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대중은 인터넷 상에서 댓글, 조회수 등을 통해 24시간 쉬지 않고 담론의 존재를 형성하는 주체가 된 동시에 그 담론에서 완벽히 빠져있는 모순된 존재가 됐다. 대중이 접근할 수 있는 영상과 정보들은 이미 발화자와 플랫폼에서서 특정 의도에 기반해 몇 차례 가공된 것들 뿐이며, 생계에 직결된다는 인식이 없는 한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의 자동적으로)와 닿는 정보들 중에 일부러 수고를 들여 가치있는 것들을 가려내고자 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
대중이 생산해 내는 트래픽과 바이럴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된다. 하지만 이 트래픽과 바이럴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 이 숫자와 의견들이 가공 되어지는지에 따라 다르다. 단 한번의 클릭까지 모두 추적되는 현대의 이 시스템 상에서 '데이터'란 단어 또한 이전과 다른 의미가 되었는데 이제 데이터는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데이터로 기록되기 시작한 지금은 데이터 과잉의 시대이며, 데이터만 그러 모았을 때 그 자체로 어떤 현상을 읽어낼 수는 없다. 누군가 로제 떡볶이를 먹고, 누군가 새로나온 플레이 스테이션 게임을 하고, 누군가가 몇시에 유튜브를 가장 많이 보고, 이런 사실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로제 떡볶이를 먹은 사람에게 다른 종류의 떡볶이를 팔고 싶거나 플레이 스테이션을 가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게임을 팔고 싶다면, 혹은 특정 시간대에 누군가에게 어떤 영상을 보여주고 싶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데이터는, 그 데이터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도에 따라서만 효력을 가진다.
유저 트래픽이란 데이터는 단순히 누가 무엇을 먹고, 사고, 좋아하는지 같은 전통적 마케팅 메시지를 떠나 정치적 확증편향을 공고히 할 수 있는 프로파간다까지 가능하도록 만든다. 이제는 이미지와 영상이 지나치게 많은 시대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안내하는 해쉬태그와 추천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의 선전물들이 배포 가능해지는 것이다. 인터넷만 연결 돼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초저렴한 비용으로 선전물을 뿌릴 수 있다. 이런 '가성비' 선전 방식이 심지어 민주적으로 누구나 접근이 가능한 소스로 존재하는데 이것이 기업들의 상업 마케팅에만 머물 이유가 없다. 정치인과 담론을 장악하고자 하는 지배 계층들, 그리고 온라인 상에서 자아를 형성하는 대중 모두가 프로파간다에 참여할 수 있다.
스스로 바보가 아니라는 확신에 찬, 몇 억명의 대중이 이런 선전물들과 뒤섞여 사는 모습을 이미지적으로 상상해 보자. 이 이미지를 떠올리고도 인류의 미래가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엄청난 낙천주의자거나 이 선전물을 만드는 지배 계층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새 시대는 부정적인 의미까지 포함해서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이다. 모든 것이 더 손쉬워지고 편리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세상은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더 복잡한 방식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동영상 플랫폼에서 보여주는 타인이 만든 영상들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나를 안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이것은 'TV는 바보 상자다' 같은 단순한 이야기와도 다르다. TV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을 바보처럼 보이게 한 것뿐이라면, 지금의 인터넷은 끊임없는 클릭과 그 클릭으로 인해 플래시 수준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 속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유영한다는 느낌을 줌으로서 우리가 바보가 아니라고 스스로 확신하도록 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바보가 아닌지 맞는지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한다. 한 가지 희망적인 점은, 굳이 시간을 들여 긴 글을 여기까지 읽어 내려온 당신과 나에게는 그래도 일말의 생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