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일상을 바꾼 카카오톡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작은 스타트업을 창업한 20대 후반의 제이비(JB)는 2006년 겨울, 홍콩 출장길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박종헌 교수는 전화기 너머로 “IT 업계에서 한차례 성공하셨던 분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함께할 창립 멤버를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한국에 돌아온 제이비는 곧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브라이언(Brian)이었다. 두어 번 함께 진한 술잔을 기울인 뒤 그는 브라이언과 함께 아이위랩(IWILAB)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지난 2년간 열정을 쏟아부었던 스타트업을 접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건 어려운 선택이었죠. 결정의 원동력은 두 가지였는데요. 첫째, 큰 성공의 경험과 내공을 가진 브라이언과 함께라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둘째, 그 성장을 기반으로 훨씬 더 큰 회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제이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보인다.
아이위랩 초반 몇 년의 기억은 제이비에게 선명하게 남아있지 않다.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지우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유일한 기억은 “새벽에 홀로 정자동 사무실에 남아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눈물을 흘렸던 장면”일만큼, 쉽지 않았다. 그 눈물이 마를 때쯤에서야 카카오톡이 탄생했다.
카카오톡이 출시되기 이전, 도전은 험난했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브라이언이 제이비를 비롯해 최고의 동료들을 모집했을 때, ‘뭔가 새로운 걸 하고 싶어’ 기꺼이 합류한 이들이 있다. 소위 말하는 ‘대기업’에서 10명 남짓한 작은 회사로 이직한 이유는 단순했다. “개발을 하고 싶은데 문서를 더 많이 써야 하는 문화가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위랩에는 이전부터 함께 합을 맞춰 오던 좋은 동료가 있었고, 또 업의 본질에 충실하고자 하는 공통의 철학도 있었다. CTO였던 영(Young)은 2007년 5월부터 합류했다. 마음이 맞는 동료인 스캇(Scott), 브랜든(Brandon)도 연이어 함께 일을 하게 됐다.
아이위랩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건 ‘부루(buru) 닷컴’이라는 구독 서비스였다. 인터넷 북마크 컬렉션 서비스였는데, 미국 법인을 설립해 글로벌향으로 준비했지만 반응은 기대에 못 미쳤다. 다음 타자는 ‘위지아(wisia) 닷컴’이었다. 네티즌들이 정보를 올리고 평가를 하는 ‘집단지성’을 표방한 웹 서비스였다. 2008년 말에는 미국 법인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 위지아와 함께 아지트(agit)를 만들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이미 아이폰3gs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 출시 전인 아이폰을 두고 변화를 예감하기 시작했다. 웹이 아닌, 모바일을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를 만들어야겠다는 브라이언의 결단이 뒤따랐다.
“3년 넘게 이렇다 할 성공작을 만들어내지 못했죠. 좋은 동료들이 있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실패를 거듭할 순 없었어요. 딱 5년을 기점을 봤죠. 그때까지 모든 걸 쏟아보고, 안되면 접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영의 말이다.
엔지니어였던 스캇은 “프로젝트는 계속 진행되고 있지만 방향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다. 개발자와 기획자들 사이에 격렬한 토론과 충돌이 오갔다. 이제는 정말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폰 이용자들의 가입 만으로는 부족했다. 브랜든은 갤럭시 S 출시에 맞춰 안드로이드 버전 개발을 시작했다. 2010년 8월, 카카오톡 안드로이드 버전이 배포되면서 이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카카오톡은 출시를 준비하면서 10만 명이 사용하는 서비스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영은 말한다.
“웹 서비스를 개발할 땐 10만 명을 사용하게 만드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그동안 발표했던 서비스들도 대부분 3만에서 4만 정도였고, 가입자 수 자체가 적었죠. 그걸 넘어서고 싶었어요. 그런데 카카오톡이 어느 순간 일 가입자 10만 명을 넘어서기 시작했어요. 이런 숫자는 처음이었죠.”
제이비는 그 엄청난 일이 벌어진 2010년을 이렇게 회상한다.
“하고 싶다고 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작은 팀이 너무나 큰 서비스를 갖게 되면서 수많은 문제를 해결 하기에 정신이 없던 시절이었죠. 주문한 서버가 도착하기도 전에 추가로 서버를 주문해야 할 만큼 트래픽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이통사들은 카카오톡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죠. 카톡을 잡으려고 여러 IT기업들이 경쟁 제품을 내놓거나 준비하기도 했고요. 크루들 모두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밤낮없이 필사적으로 달리던 2010년이었어요.”
카카오톡의 성장을 모두들 예상하고 있었을까? 스캇은 이렇게 답했다.
“카카오톡이 최초의 모바일 메신저는 아니에요. 이미 미국을 비롯해 국내에서도 비슷한 서비스들은 많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가장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서버를 가장 단순한 버전으로 만들고,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계속해서 구조를 고쳐나갔다. 물론 ‘무결점’ 서비스였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용자가 증가함에 따라 큰 불편함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차별점이었다. 브랜든은 카카오톡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렇게 바라봤다.
“기존에 나와있던 모바일 메신저들을 쓰면서 느꼈던 불편한 부분들을 개선해 카카오톡을 만들었어요.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서비스가 출시된 셈이죠. 그 서비스를 만든 멤버들이 모두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좋은 팀워크를 기반으로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였어요. 이용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때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한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었던 점이 카카오톡의 가장 큰 경쟁력이었죠.”
카카오만의 ‘일 하는 문화’도 성공의 비결로 꼽힌다. 제이비는 카카오에 몸 담고 있었던 8년의 모든 과정이 ‘신뢰, 충돌, 헌신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카카오는 초기부터 회사의 특별한 가치와 문화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어요. 브라이언을 비롯해 딘(Dean) 그리고 영과 함께 경영회의에서 많은 논의를 했죠. 2008년 노트를 발견했는데, 당시 우리의 생각이 고스란히 적혀있어요. 초기의 카카오 문화는 사실 경영진들 보다, 당시 함께 하던 크루들이 다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이 “우리는 어떤 회사를 만들고 싶은가?”였어요. 그에 대한 답이 초창기 문화에 담겨있겠죠. 하지만, 문화에는 정답이 없어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바뀌듯, 문화도 바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카카오 크루들이 현재의 카카오에 더 적합하고 좋은 문화를 만들고, 사회에 더 많이 기여할 수 있는 회사로 만들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브랜든은 카카오의 문화를 이렇게 말한다.
“초창기 크루들 중 기존에 경험했던 전통적인 회사를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다 그렇게 하니까’ 일해온 전통적인 방식에 피로감을 느꼈던 이들이 브라이언과 함께 다른 방식의 회사를 만들고 싶어 했죠. 브라이언과 영을 비롯해 같이 일하던 모두가 서비스에 대해서 격의 없이 토론하고 개발하는 걸 좋아했어요. 워낙 신뢰가 두터운 사이인 데다 처음부터 영어 이름을 사용했고, 그게 카카오 특유의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만드는데 한몫했다고 봐요.”
영은 카카오 크루들이 ‘자율적으로’ 일 하기를 바랐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기획자들이 일을 정하고 개발자에게 과제를 던지는 게 아니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함께 토론하고 프로젝트를 만들어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죠.”
개인화할 수 있는 카톡 배경 화면도 ‘자기 주도적으로 일 하는’ 태도에서 탄생했다.
“회사가 서울 역삼동에 있을 때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면서 사람들이 빈 시간에 모두 카톡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화면을 보면서 대화하는 게 지겨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카톡 테마였어요.”
다양한 버전의 카톡으로 사용하는 즐거움을 주자는 브랜든의 아이디어는 주효했다. 거창하게 미래의 비전을 보고 기획하기보다, 이용자 입장에서 개발하고 기획하는 이들이 필요한 기능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첫눈 오는 날, ‘눈 내리는 카톡창’도 비슷한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기획안을 만들고 검토하면 너무 오랜 시간이 소요되니까 아예 ‘카톡 실험실’이란 곳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테스트를 했다. 눈 내리는 카톡창은 테스트 단계에서 이견이 나오지 않았고, 곧장 출시가 됐다. 이런 사례들이 쌓여서 ‘자기 주도성’은 카카오톡과 카카오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유래 없는 카카오톡의 성공에 대해 이들은 모두 “일생에 한 번 겪기 힘든 경험”이라고 말한다. 영은 “과연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정도의 성공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렵다고 봐요. 물론 당시에는 성공과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재해서 정신이 없었지만 말이에요.”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브랜든은 카카오톡과 깊은 인연이 있다. “카톡 알림음이 실은 큰딸의 목소리예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현재까지 카톡의 대표적인 소리가 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제이비는 결국은 사람이 다 인 것 같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카카오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함께 했던 모든 크루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카카오톡이 이들에게 주는 특별한 의미는 또 있다. 철저하게 이용자를 최우선으로 삼고 서비스를 만들면 끝내 인정받는다는 크루들의 철학이 세상에 알려진 점이다. 직관과 자기 주도성, 수평적인 충돌과 빠른 의사 결정, 이용자에 대한 이해와 헌신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가치는 한국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